《극우의 노래》 남태현 저자 인터뷰
“정치는 결국 우리 삶의 문제니까요.”
🎤 편집자 산책자 & 저자 남태현
안녕하세요, 선생님. 《극우의 노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간단히 독자들에게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미국 워싱턴 D.C. 근처에 있는 솔즈베리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위와 억압에 관심이 많아, 그동안 그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해왔습니다. 아내와 식사하는 시간을 즐깁니다. 주로 한국식으로 먹죠. 한국 마트에 가면 차돌박이를 사서 구워 먹고요. 동네 푸줏간에서는 삼겹살을 찾습니다. “Fresh Bacon”이라고 하면 알아서 잘 챙겨주시죠.
한국 드라마도 자주 보고, 유럽 형사물도 좋아합니다. 형사물은 사회의 가장 극적인 단면을 보여주죠. 미국 사회를 비추는 교과서 같은 드라마는 〈더 와이어(The Wire)〉입니다. 재미로만 보자면 〈루터(Luther)〉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토트넘 팬이기도 합니다. 동네 공식 서포터 모임이 있어서, 거의 모든 경기를 이들과 함께 보죠. 2025~2026시즌에는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맥주와 위스키도 좋아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는 모닝페이지를 씁니다.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라미 만년필이나 블랙윙 연필로 꾹꾹 눌러 써내려가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되는 느낌이 듭니다. 산만하고 걱정이 많은 저에게는 참 필요한 시간이죠.
격투기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쭉 해왔습니다. 지난 10년은 브라질리언 주짓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가서도 수련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는 합니다. 그럼에도 실력은 많이 모자랍니다. 나이도 있으니 힘도 예전 같지 않고요. 그래도 누굴 이기려고 하는 건 아니니, 아직은 즐길 만합니다.
1996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래서인지 한국이 그립고, 고향이 자주 생각납니다. 뉴스나 드라마에서 익숙한 풍경이 비치면 가슴이 찡해지죠. 한국에 가면 예전에 가던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혼자 흐뭇해합니다. 달라진 게 참 많아서, 그대로 남아 있는 옛 가게나 얼굴들을 보면 더 반갑습니다.
《극우의 노래》를 쓰기 위해 한국을 자주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태극기부대의 집회를 지켜보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텐데요.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하셨는지요? 또 책에는 쓰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처음 서울역 광장에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에서 광장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죠. 낯설고, 신기하고, 또 정말 시끄러웠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시민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표정이었죠.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면서, 사회가 쫙 갈라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외부인이다 보니, 경계의 눈초리도 있었죠. 어디서 왔냐, 뭐 하러 왔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꺼낸 무기가 제 명함이었죠. 미국에서 교수로 일한다고 하면 분위기가 금세 달라졌습니다. 광장을 관리하던 분이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고, 인터뷰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박근혜 탄핵 직후에는 제게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말 좀 전해달라고요. 제가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라서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그 말에 담긴 절박함은 진심이었죠. 미국이 뭔가 해줄 거라는 기대 자체가, 참 씁쓸하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몇 번을 오가다 보니, 저를 알아보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인터뷰는 그만하고 시위에 직접 참여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요. 어떤 단체 회장은, 작년에 왔던 사람 아니냐며 반가워하기도 했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태극기부대에 참여한 분들 대부분은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요란하고 거친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은 참 따뜻했고, 또 우리가 흔히 보는 얼굴들이었죠.
계엄사태 이후 한국에서 ‘극우’에 관한 논의가 폭넓게 오갔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극우’란 무엇이고, ‘태극기부대’를 극우로 칭한 이유는 무엇인지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준석을 극우 정치인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좌파의 반대 개념으로 우파라는 말을 쓰죠. 경제적으로는 시장 중심의 질서를 지지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이나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세력을 우파라고 부릅니다. 극우는 그 가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경우를 말하죠.
추구하는 내용도 극단적이고, 방식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민족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민족을 적대하거나 배척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민족의 안위를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죠. 민주주의의 원리나 제도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태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준석을 극우 정치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이대남 정치, 갈라치기식 언행이 비판을 받을 수는 있죠.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극단적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추구하는 방식만 놓고 보면, 민주주의의 틀 안에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극우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먼저 그 개념이 정의되고, 일정한 합의가 이뤄진 상태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우파 정치인을 그냥 극우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극우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죠. 정말 위험한 극우세력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계엄사태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언제든 훼손될 수 있다는 걸 지켜봤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단단해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주체제의 장점은 사회를 화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시민들이 정치적 정당성에 합의하죠. 신의 뜻도 아니고, 피의 혈통도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 간의 합의로 권력을 세운다는 건 참 혁명적인 발상이었죠. 하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쉽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 내란 사건은 이 체제의 허약함을 잘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도 마음만 먹으면 그 체제를 뒤흔들 수 있으니까요.
이런 위험을 막는 방법은 뭘까요? 결국 시민의 힘입니다. 실제로 한국의 시민들이 보여주었듯, 정치적 각성과 행동이 체제를 지켜냈습니다. 시민이 권력의 주체라는 인식, 그리고 그 권리를 지키려는 실천이 있을 때, 총칼은 무력해지는 법이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극우든 극좌든, 성소수자든 노인이든, 실업자든 어린이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 체제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소수일지라도,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죠. 그 믿음과 만족이 체제를 지킬 이유가 됩니다.
아직 한국은 이런 면에서 갈 길이 멉니다. 선거제도 등 제도적 장치를 개선해, 다양한 소수가 배제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또 다른 윤석열의 등장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 정권은 극우세력을 통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계엄사태 당시에도 국민의힘은 탄핵을 반대하고 극우적인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우파와 극우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한데요. 두 세력이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 우파의 중심에는 친미와 반공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그 출발점이겠죠. 그만큼 뿌리가 깊고, 한국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민주당도 좌파 정당은 아닙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민주당을 ‘중도우파 정당’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친미와 반공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 기본값처럼 작동합니다. 그만큼 우파의 힘이 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극우는 이런 가치를 더 강하게, 더 거칠게 밀어붙이는 세력입니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표현 방식에서 훨씬 과격하죠. 그러니 국민의힘이 극우에 쉽게 이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반대로 이 흐름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주류에서 쉽게 밀려나죠.
문제는 친미와 반공이라는 이 가치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파의 가치라면, 사회의 근간이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의 방향이 되어야겠죠. 그런데 지금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정책을 보죠. 친미나 반공이 어떤 기준이 됩니까? 에너지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출생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현안을 들여다봐도, 이 가치들이 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당은 일관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구호만 외칩니다. 레토릭은 요란한데 방향은 없죠. 그렇게 되면, 극우와의 차별도 흐려지고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위험을 우파세력이 윤석열 사태로 배웠으면 합니다. 우파가 새로운 가치로 성장하고 강력해져서 극우와의 차별이 뚜렷해져야 한국사회가 더 안정될 겁니다.
극우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고, 그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요?
같이 맥주 한잔하시죠. 극우세력이 어떤 집단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친구나 가족 중에 그런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함께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자리가 필요하죠. 공감대를 넓히고, 최소한 우리는 적이 아니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랑 어떻게 대화를 해?”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전부 옳고, 전부 사실일까요?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다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예배 시간에 나오는 말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그 말을 바깥세상에서 꺼내면 이상하다는 반응이 돌아올 때가 있죠. 성경이 진리라고 믿지만, 그건 종교적인 확신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죠. 나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자각, 쉽지 않겠지만 꼭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시민들 사이의 유대가 무너진 사회는 아주 위험해집니다. 공존하려는 의지가 약해지면, 그 틈을 독재자가 파고들기 쉽죠.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해주세요.
한국사회에는 지금 당장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습니다. 기후위기, 양극화, 남북 간의 긴장. 하나같이 무겁고, 절실한 과제들입니다. 이런 숙제를 풀라고,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세금을 냅니다. 공적 책임을 맡기고, 공적 자원을 씁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작 숙제는 하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느라 바쁘고, 책임은 미루기 일쑤죠. 그러다 보니 과제는 쌓이고, 피해는 시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옵니다. 앞으로 그 피해는 더 깊고 넓게 퍼질 겁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이들이 더는 숙제를 미루지 못하게, 시민이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감시하고, 질책하고, 표로 말해야 합니다. 정치란 결국 시민의 것이고, 정치 지도자란 시민의 일꾼이란 걸 알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회초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숙제를 대신해줄 사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함께해야 합니다.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고, 공공 문제에 참여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서로를 적으로 보지 말고, 함께 사는 이웃으로 봐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웃과도 맥주 한잔 나눌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야말로 독재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건강한 민주사회겠죠.
오늘 이 글을 읽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사회를 지키는 주인입니다. 정치에 대한 실망이 크더라도, 손 놓지 말고 지켜봐주세요. 정치는 결국 우리 삶의 문제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