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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위험을 감수할 이유를 찾아라
말을 많이 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업보라는 개념을 모를 때에도 그 불길한 느낌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특히 남에 대한 말은 웃길수록 위험했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의 담임은 시골 학교에서 보기 드문 중년 여성이었다. 퇴임을 앞둔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아 이런저런 소문이 따라붙었다. 그는 항상 진하게 아이라인 그린 눈 아래로 뾰족한 안경을 콧잔등 멀리 걸친 무표정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파마머리가 항상 잘 세팅되어 있었고, 뭔가를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장순옥 선생님 앞에서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알던 아줌마들은 익살스러웠고 그림책의 할머니들은 자애롭거나 푸근했지만, 선생님은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었다. 아직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편집장과 〈해리포터〉 시리즈의 엄브릿지 교수를 영화로 보기 전이었기 때문에 낯선 첫인상의 긴장감은 꽤 오래 지속됐다.
과학 시간에 긴장은 무르익었다. 선생님이 직렬과 병렬 개념을 반대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선생님! 지금 반대로 설명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는 무시하고 수업을 이어갔다. 억울한 마음으로 집에 가서 엄마한테 씩씩대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일렀다.
“혜지야…… 그래도 수업 끝나고 선생님께 조용히 얘기하지 그랬어.”
“왜요? 반 친구들도 다 알아야 하잖아요.”
장순옥 선생님과 함께 교직생활을 하던 엄마는 먼발치서 나의 학교생활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선생님이 출제한 시험문제에서도 직렬과 병렬 개념이 바뀌어서 나왔고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이 공식적으로 정정되었다. ‘선생님이 틀리고 혜지가 맞았더라’ 사건은 이후로도 종종 일어났고 선생님은 내가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잡도리하기 시작했다. ADHD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도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늘 주변이 지저분했다. 선생님은 내 주변이 조금만 어지럽혀져도 불같이 화를 냈다. 한번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내 가방을 교실 밖으로 던져버린 적도 있다. 나는 나에게만 유독 엄격한 선생님이 싫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앙심을 품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은 모임이 만들어졌다. 선생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다른 친구들도 꽤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싫은 마음이 원래 모양보다 몸집을 훨씬 부풀렸다. 열두 살, 선생님이 아닌 또래 집단에 인정받고자 하는 자아가 등장한 것이다. 공통으로 싫어하는 누군가에 대해 얘기하며 친해지는 건 엄청난 중독성이 있었다. 게다가 이 세팅에서는 다들 굉장한 집중력으로 대화에 참여했으며 평소보다 반응도 커졌다. 자연스레 웃기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었고 나는 더 들떴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세 번쯤 지적받은 어느 날, 나는 울분에 차서 쪽지에다가 글씨를 마구 휘갈겨 옆 친구에게 건넸다. 바다에 띄운 종이배처럼 몇 명에게 더 전달된 쪽지에 쓰여 있던 글자는 이랬다:
장순옥 싫어
마귀할멈
쪽지를 받아 든 친구들은 킬킬 웃었고 우리는 당연히 선생님에게 걸렸다. 선생님이 쪽지를 펼쳤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눈이 콧잔등-안경 너머로 나를 정확히 바라봤다. 큰일 났음을 직감한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고 귀 뒤부터 시작해 볼까지 새빨개졌다. 당시는 모든 상대에게서 카톡 지우기 기능도 없었고 DM 방을 나갈 방법도 없었으며…… 쪽지의 근원지인 나는 크게 혼났다. 심지어는 책상을 교실 밖으로 따로 빼서 며칠을 혼자 앉아 있는 처분이 내려졌다. 동시에 안티-담임 무리의 시선도 사방에서 느껴졌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밀려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약간 뿌듯한 마음? 개선장군이 된 느낌?
복도에 격리되어서 수치스럽거나 외로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감각은 그 사건을 둘러싼 강렬한 흥분과 그 후에 찾아온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내 특별석에 찾아와서 같이 떠들고 우리는 빵 같은 걸 나눠 먹었다. 복도에 지나가던 우유 당번이나 다른 반 친구들과 장난을 쳤다. 그리고 나는 2학기에 반장이 되었다.
교사생활을 4년 해본 지금, 장순옥 선생님의 훈육 방식에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이해는 간다. 내 수업에서 학생이 ‘금혜지 미친년 존나 싫어’ 따위를 카톡방에 보낸 걸 모니터 너머로 봤다고 상상하면…… 그리고 수많은 ‘ㅋㅋㅋㅋㅋㅋ’이 답글로 달렸다고 생각하면…… 맥북 하나를 교실 밖으로 집어 던지고 고소라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쪽지 내용은 얼마나 일차원적인가. 마귀할멈이라니. 비꼬거나 고급 유머를 사용할 여지가 전혀 없다. 걸리면 바로 혼이 날 만한 도발이다. 그러나 저 말이 또래 집단에서 웃음을 유발할 거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난 위험이 감지되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말하고야 마는 어른이 되었다. 게다가 그때조차도 웃기고 싶어 한다. 아니, 그때야말로 기회라고 여긴다. 이런 성질은 낯선 사람이 많은 모임의 초반일수록 강화된다. 글방은 거의 초면인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글을 합평하는 모임이다. 당시 참여했던 글방에서도 새로운 기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광대 기질이 강하게 발현되고 있었다. 첫 모임에서는 ‘어인 일로 오셨나요’라는 글감으로 즉석에서 글을 썼다. (2년 전에도!) 이 책의 원고를 작업 중이던 나는 이렇게 썼다.
“인정 욕구와 경쟁심이 강하고 자극과 중독에 취약한 저에게 누군가를 웃긴다는 건 상당히 위험하고 재밌는 일입니다. 웃음이라는 즉각적인 보상, 즉 도파민 중독에 나도 모르게 빠진 채 살아왔던 것이죠. 다행히 다른 중독과는 달리 건강이 심하게 훼손되거나 치료나 재활이 당장에 필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저 많이 말하고 많이 실패하고 수치심을 견디면 오케이입니다. 코미디라는 단어로 대충 포장할 수도 있고요.
그야말로 필패를 감수하고 누군가를 웃기려는 시도에 괜히 의미를 붙여보려고 저와 비슷한 광대들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를 〈금개의 시도〉라는 팟캐스트로 만들어 송출하고 있고요, 방송 녹취를 가지고 원고를 쓰려는 계획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머를 가진 창작자들을 착취해 알아낸 코미디 기술을 엮어 자기계발서를 쓴다……는 상당히 야심 찬 기획을 하고 있죠. 어떻게 될까요…… (니가 써야지……)”
이 글을 읽고 말수가 적은 한 글방 동료가 조심스레 물었다.
“금개님은 어떻게 그렇게 매번 실패할 각오로 시도할 수 있나요?”
깔깔이를 향한 갓반인의 잔혹한 질문. 내 대답은 이거였다.
“저는 말할 때마다 작은 자살을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써놓고 보니 진지해 보이지만, 심각한 말투는 아니었다. ‘작은’ 다음에 귀여운 입 모양으로 ‘타이니(tiny)’라고 덧붙였고, 손가락을 작은 사람처럼 만들어서 작게 다이빙하는 손동작을 덧붙였다. 부정적인 말에도 귀여운 제스처를 덧붙이면 덜 심각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어떤 농담을 던지는 순간의 각오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빗댈 만큼 위험하고 짜릿하다는 건 진심이다.
왜 굳이 그렇게 매번 ‘눈 딱 감고 낙하’를 감수하는지? 그런 건 굳이 안 해도 아무 손해도 없다. ‘가만히 있기’ vs. ‘굳이 말하기’에서 전자를 선택했을 때의 단점을 찾자면 ‘지루하다’ 정도가 있을 텐데…… 그 지루함 때문에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람이 있다면……? 너였다면 어떨 것 같아? 이런 미친 날들이 네 하루가 되면 말야……? 심리검사 중에 잘 바뀌지 않는 타고난 기질을 알아보는 ‘TCI 검사’라는 게 있다. 최근 그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결과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도 이런 수치는 처음 본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극을 원한다. 얼마나? 100만큼. 내 안의 max를 원해, 최대치의 자극을 원해…… 그렇다면 자극 추구를 하러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실제로 위험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엄청난 거다. 얼마나? 99만큼. 100보다는 1정도 낮지만 거기서 거기다. ‘위험 회피’가 좀 더 낮았다면 뭔가 멋진 도전으로 모험심을 채웠을 테고 ‘자극 추구'가 낮았다면 위험을 피하고 다니면서도 안심이 되었을 텐데…… 두 가지 지표가 용호상박으로 쌍벽을 이루면서 동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니 속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은 나를 마비시킨다. 양극단이 쉴 새 없이 싸우는 마비 상태에서도 살아 있음을 느낄 최선의 방법은 말로만 나불대는 것이다. 나는 앉거나 누워서 웃길 기회, 작은 다이빙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린다. 말의 세계에서는 위험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 뛰어내린 곳이 낭떠러지가 아니라 아직 나락에 처박힌 일은 없으니 하는 소리다. 농담에서는 위험을 쪼개고, 재구성하고, 일종의 연극처럼 다룰 수 있다. 웃기려는 시도에서 실패의 두려움과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들뜬 기분은 생명을 건 진짜 모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그건 통제된 환경에서 일어나는 작은 도박일 뿐이다. 나에게 코미디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두 성향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임시방편이다.
위험할수록 날카롭게 웃기고 처참하게 망칠 가능성이 동시에 커진다. 코미디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처참하게 실패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시도하는 행위 자체에 있다. 나는 웃겼다 or 실패했다는 결과보다는 굳이 그러려는 의도에 관심이 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타고난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퀴어라서이기도 하다. 다음 퀴어적 특성들은 굳이 웃기려는 이유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막간 코너] ‘퀴어함’의 특징은 무엇이고 어떻게 광대 성향과 연결되는가?
1. 구구절절하다 → 말을 많이 한다 → 지루할까봐 농담을 끼워넣는다
누가 먼저 묻지 않아도 나는 매번 비슷한 부담감에 시달린다. 퀴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다.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다른 말이 잘 안 나온다. 퀴어가 뭔지 하도 많이 들어서 “이번엔 건너뛰어~”라고 봐주는 너그러운 식구들,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라며 팔짱 끼고 있는 가방끈 긴 퀴어들도 있지만 “뭔데? 설명해줘~” 하며 눈을 빛내는 사람들도 있다. 말로는 “알려주세요~” 라면서 눈은 핸드폰 화면에 두고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지겹다. 퀴어함에 대한 사전적, 문화적 정의를 각자에게 맡기고 싶다. 나무위키를 참조하셔도 되고…… 일단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현재 존재하는 기준이 쓸 만하지 않으니 스스로 기준을 발명해야 하기 때문에, 마치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 불가피하게 많아지는데, 이런 과정은 제가 그간 다른 지면에서 ‘구구절절’이라는 표현으로 소수자 말하기의 특징을 설명하려 한 까닭이기도 해요.”
《퀴어 미술 대담》(2024)에서 이연숙 작가가 한 말이다. 인용까지 때리고 나니 벌써 한나절이 지나간다. 이게 바로 퀴어함의 핵심이다. 계속 말이 길어진다…… 말줄임표가 많아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러 맥락을 고려하게 된다…… 혹시라도 내가 또 실수할까봐, 차별하는 소수자가 있을까봐 걱정하면서…… 일단 말을 많이 하고 나니까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본인도 지루해져서 농담 레퍼토리를 만들거나 실없는 농담을 끼워넣게 되는 것이다.
2. 정상성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 놀림감이 많아진다
‘가장 보통의 사랑’ 따위의 카피가 쓰인 퀴어 영화 포스터를 보면 난 ‘또 시작이네……’ 싶어진다. 보통이 뭔데…… 뭐 어떻게 ‘가장’ 보통이기까지 할 건데…… ‘보통’, ‘일반’, ‘정상’, ‘평범’, 이런 말을 퀴어 커뮤니티에서 제일 많이 보고 들었다. 평생 들을 정상성 얘기는 퀴어들한테 다 들은 것 같다…… 사회 전체가 ‘정상적인 삶’의 모습을 대충 합의해놓고 다들 슬쩍 그 안에 들어가려고 난리들인 건 맞다. 하지만 퀴어들의 정상성 집착은 유별나다. 가만히 있어도 이미 뭔가 박탈되었다, 약간 비껴가고 있다, 큰일 난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이 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흉내내야 덜 소외되는데, 그러다보면 본인 눈에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관찰하게 된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주어진 선이 어딘지 알고 고의로 넘는 것”이 코미디언의 의무라고 말했다. 선이 어딘지 아는 데는 선 바깥에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사회적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조금 소외감이 들 수는 있다만 시야가 넓어지고 보이는 범위와 맥락도 넓어진다. 당연히 놀림감, 즉 웃음거리도 많이 보인다.
3. 외롭다 → 친구나 애인을 만들려 한다 → 웃음으로 인기를 얻어보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2020) 뒤표지에는 유성원 작가가 쓴 일기의 이 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외로움이란 뭘까?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 이것으로 모든 설명을 대체합니다.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외롭습니다…… 아무리 걸레처럼 굴러다녀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 내가 나인 이상 구멍 뚫린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인지 저는 퀴어 정체화 이후 상당히 절박한 마음으로 친구를 찾아다녔답니다. 또 우리 사회에서는 친구가 채워주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여겨지기에 애인 찾기에 대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는데요…… 내가 헤테로이던 몇 년 전만 해도 틴더 같은 온라인 구애 도구는 유별나게 절박하거나 발정난 사람들만 쓰는 거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성소수 사회에 와보니 어플 만남은 자연스러운 만남에 해당하는 거다. 얼굴에 퀴어라고 써 붙이고 다닐 수 없으니 (물론 그런 애들도 있다) 온라인에서 먼저 연락이 닿고 실제로 대면하는 방식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그저 어떤 가능성만으로 만나게 되는 어색한 자리가 많아질수록 웃음을 통해 긴장을 내려놓게 하는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코너 끝]
말이 많거나, 경계에 대한 인식과 관찰력이 뛰어나거나, 외로운 것은 비단 퀴어만의 특성이라고 하긴 어렵다. 성 정체성과 관련 없이 당신에게도 광대가 될 만한 퀴어적 자질이 있을 수 있다. 말조심에 대한 가르침은 차고 넘친다. 천 냥 빚을 지거나 갚을 가능성, 침묵이 금이라는 자본주의적 접근부터 종교적 가르침까지. 성경에는 "많이 말하는 데에는 죄가 있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는 지혜롭다”, 법구경에는 "말이 너무 많으면 그 끝에 항상 후회가 따르며,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없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도 굳이 말하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것도 한없이 가벼운 농담을? 선생님께 혼날 위험을 감수했더니 친구가 생겼던 유년기의 사건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의 광대 DNA에는 각인되어 있다. 누군가를 웃기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같은 농담에 웃고 나면 너랑 나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은 우리를 포함하는 바깥으로 다시 그려진다. 농담 이후엔 선 안쪽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다. 나는 최대한 선을 멀리 그리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 있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작게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에게는 굳이 업보를 쌓아도 괜찮은 이유가 있는지? 뭐, 없어도 괜찮다. 세상에 너무 광대만 많으면 균형도 안 맞고 피곤해진다. 편한 쪽으로 하세요……
*코미디언 이제규의 스탠드업 스페셜 〈이제규 Extended〉의 레퍼토리에서 차용했다. 종로 근처에서 데이트가 있다면 ‘서울 코미디 클럽’의 이제규 공연을 보러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