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자께서 지난 12ꞏ3 윤석열 내란 사태 탓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날들을 보내고 계실 듯합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분노할 거리가 생겨나는 시기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그 무엇에도 지지 않고 일상을 잘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늘의 레터 시작합니다. 오월의봄 구성원들도 시민으로서 저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적정 코미디 기술》(금개) 출간 전 연재 글은 별도의 뉴스레터로 발행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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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와 마케터의 서신 교환
✉️ 편독자 X 모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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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독자님, 안녕하세요.
제가 며칠 전 이 편지에 관해서 우는소리를 했죠. 나누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 역시 편지의 공동 수신인이기에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이 막막함은 책을 소개할 때 늘 따라붙는 고민과도 연관된 건데요. 독자에게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그런 고민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저 역시 처음 이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아무리 비비언 고닉이라도 그렇지, 공산주의자에 관한 책이 지금 시대에 번역되겠어······?’라고 생각했던 독자였거든요. 한편으로는 다 읽고 난 뒤 어떤 말을 쓰더라도 이 책 속에 작가와 그가 만난 사람들이 부려놓은 압도적인 말들보다는 힘없이 찌부러지는 것 같았어요. 어떤 총체적인 존재감에 사로잡힐 때면 오히려 그걸 설명할 말이 부재하게 되니까요. 그때 저에게 인상 깊었던 한 부분이라도 좋으니 편히 써달라고 말씀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요? 처음 세부적인 정보 없이 ‘비비언 고닉이 쓴 공산주의자들에 관한 책’이라는 간략한 소개를 들었을 무렵, 막연히 생각했어요. ‘드디어 고닉이 완전한 타인에 관한 글을 썼구나.’ (심지어 ‘드디어’도 아닌 게, 이 책은 고닉의 첫 책과도 다름없잖아요?) 한국에 먼저 출간된 고닉의 책을 모두 읽었음에도, 그가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깊이 얽히고 자랐으며, 그것이 그의 중요한 정체성 중의 하나를 형성한 배경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죠.
저는 고닉의 회고록에서 그가 묘사하는 타인에 늘 매료되었어요. 아주 명민하거나, 미쳤거나, 남루하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말도 안 되게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이거나. 그가 써내려간 사람들은 언제나 상황과 꼭 맞게 서술되어 마치 제가 알고 있는 이들 같았죠. 그들은 자신에 관한 서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 (만일 누군가 저에 관해 그렇게 낱낱이 쓴다고 상상하면······ 정말 무서울 것 같긴 하네요.) 그런데 원고를 읽기 시작할 때쯤, 편독자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이 책이 고닉의 또 다른 자기서사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 제 안의 어딘가에 금이 갔던 것 같아요. 그렇지, 그렇구나! 저 스스로 깨닫기 위해 곧장 원고를 읽기 시작했고, 비로소 몇 개의 장면이 차례대로 제게 들어왔어요.
하나, 유년 시절 집에 엄마와 아빠의 ‘우리 사람들’, 즉 공산당원들이 찾아와 “사안”이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항상 여기서는 무언가 중요한 일,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 있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며,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차린 고닉의 모습.
또 하나, 열다섯 살에 노동청년연맹Labor Youth League(청년공산주의자연맹의 마지막 버전)에 가입해서 레닌,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벽을 덮고 있는 다락방 모임에 참석했던 고닉이 그 모임을 담당하던 당 조직책의 훈계와 과제를 ‘갈수록 생경하게만 들리는 언어’라고 말하는 부분. 학교에 가서 멜빌, 만, 울프, 도스토옙스키를 배우며 고닉의 내면에 새롭게 자리 잡은 언어들이 밀어내고 있던 언어ㅡ아버지의 주방에 모인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들ㅡ를 ‘갈수록 생경하게만 들리는 언어’로 표현한 부분이었는데요. 『사나운 애착』에서 고닉이 시티칼리지에 진학하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포크너, 디킨스, 마르크스, 제인 오스틴을 접하며 열의에 불탔던 시기, 사상이나 개념을 배우면서 서서히 지적인 삶이라는 충만한 개념이 내면에 끓어올랐던 때에 관해 쓴 부분이 기억났거든요.* 같은 책에서 고닉이 대학에 입학한 뒤로 자신이 드디어 ‘생각을 시작한다’는 걸 견디지 못하는 엄마와 서로를 죽일 듯이 몰아붙이며 지독하게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마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에 담긴 이모와의 에피소드가 그즈음 있었던 일일 거란 예상도 해보았어요. 이모와 맹렬하게 싸우는 장면 말예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연설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통치의 참상을 전 세계에 폭로한 뒤 좌파 조직에는 정치적인 파국이 드리웠고, 그쯤 분노로 가득 찬 고닉 옆에는 여전히 열혈 스탈린주의자였던 이모가 있었죠. 고닉은 이모에게 “거짓말에 반역에 살인에. 모스크바에는 미친놈이 앉아 있었던 거라구요!”라는 말과 더불어 “이모 같은 사람들이 그 세월 동안 이 미친놈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망쳐놓고 또 망쳐놓은 거구요.”라는 말로 비수를 꽂잖아요. 이모는 절대 지지 않고 “빨갱이 사냥꾼 같으니라구!”하고 맞받아치고요. 으악, 분노와 비통의 한 가운데에서 혈족과 나누는 정치 이야기라니. 대화라기보다 상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에 가까운······! 끊임없이 소환되는 저의 기억을 억누르며 읽어야 했죠. 고닉은 이것이 비단 자신과 이모가 공유한 개인적인 비통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외려 이 모습은 서구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장면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과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고닉의 삶에 너무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하는 장면들이 계속되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파국과 분열을 경험한 시점 이후에 쓰인 그들에 관한 책은 모두 짙은 ‘타자성’의 뉘앙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관찰자나 행위 묘사자 들은 이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유리시키는 글만 생산해낼 뿐이었다는 점을 짚으며 고닉은 거듭 고개를 젓죠. 아니야, 내가 봤던 그 사람들은 그렇게 단일하거나 열등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
마치 고닉이 페미니즘을 만나고 알아갔을 때처럼, 힘없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결정 당하는 자에서 결정하는 자로 나아갔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이 세상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깨달아가면서 그 내면에서 펄떡거리는 생에 관한 감각, 생명력 같은 강렬한 감정과 함께 드디어 ‘삶’을 마주했던 사람들이었죠. 다름 아닌 ‘자기창조 행위’에 대한 폭발적인 열정. 이 모든 걸 거친 사람들의 “풍성한 인간사”를 지워 왔던 그간의 역사 속에서, 결국 고닉이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라는 책으로 다시금 그들의 삶을 길어올렸다는 점에서 저는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그 풍성함을 위해 고닉이 택한 방식, ‘정치적 경험의 감정적 의미에 집중하기’가 너무나도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책을 덮고 난 뒤 또 한 번 생각하게 됐고요.
결정적으로 “나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고, 내 부모의 세계를 파악하고, 내가 마음으로 이해하기 훨씬 전에 신경 말단으로 이해했던 것에 형체와 성격과 해석을 부여하는 시도”였다는 1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자신과, 미친 듯이 싸웠던 이모와, 우리 세계라는 틀 속에서 끊임없이 무너져갔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책을 비비언 고닉의 자기서사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편독자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고닉은 자신의 또 다른 저서 『상황과 이야기』에서 영국 작가 애컬리J. R. Ackerly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관한 책을 그의 죽음 직후 바로 쓰지 않고, 30년이나 지난 후에 썼다는 점에 주목하며 상황과 이야기, 그리고 서술자인 ‘페르소나’에 관해 말해요.** 여기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일은 고닉이 말하고자 하는 ‘상황’이며, 꺼내 놓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은 ‘이야기’인 것이죠. 『상황과 이야기』에는 “인생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칭찬받을 수는 없다”라는 영국 소설가 빅터 소던 프리쳇Victor Sawdon Pritchett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요. 저는 ‘상황’만으로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말로 이해했어요. 고닉은 이야기가 스스로 나아가려면 사람들과 사건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고 썼습니다.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의 나가는 글이 담긴 5장에서 고닉은 “어째서 내가 1970년대 중반에 그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를”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상황과 이야기』에 쓴 바로 해석하자면, 그때의 상황들이 어떻게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지 서술한 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야기란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라는 그의 문장을 읽으며, 독자들께서 지금 이 시점에 한국에서 왜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읽혀야 하는지 책을 덮은 후 생각해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의문으로 시작해 서서히 이해하는 동안 느꼈던 여러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거든요. 그리고 그 의문으로부터 나아가 책의 여러 의미 중 한 부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딛게 해주신 편독자님께 감사드려요. 책의 의미를 저보다 먼저 감각했던 편독자님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편독자님의 해석이 언제나 궁금한
마케터 모래 드림
*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노지양 옮김, 글항아리, 164쪽
**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이영아 옮김, 마농지, 24쪽
*** 같은 책,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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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마케터님, 안녕하세요.
회신을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뭉클한 서신이에요.
서신이지만, 모래 마케터님의 손때가 가득 묻은 노트를 건네받은 듯한 느낌도 들고요.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상황과 이야기』 책의 한 구절도 무척 흥미롭네요. ‘상황’과 ‘이야기’라······ 상황만으로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모래 마케터님의 뜻풀이를 읽고 있으니, 왜 고닉이 페미니즘적 국면 속에서 공산주의 이야기를 썼는지 새롭게 이해하게 되기도 하네요. 공산주의가 처절하게 망하던 그 당시 그 순간에는 결코 쓸 수 없었던 이야기를, 시간이 흘러 페미니즘적 국면 속에서 써낸 것이니까요. 공산주의라는 상황이 페미니즘이라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을 때, 그래서 옛날의 그 상황을 어느 정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이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를 쓴 거구나 싶어요.
일단 저도 ‘우는소리’ 좀 하고 시작할게요.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사실 저야말로 이 책 편집하며 (내적으로) ‘우는소리’를 많이 했거든요. 마감하고 책소개와 보도자료를 쓸 때는 심한 몸살이 나기도 했는데, 더 철렁했던 일은 보도자료를 쓰는 과정에서 이미 써두었던 2~3장의 분량을 전부 폐기하고 처음부터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는 거였어요. 마감 직전 뒤표지 카피 작업도 만만치 않았죠. 원래 그렇게까지 하는 편은 아닌데, 서로 다른 카피안을 4개쯤은 뽑아놓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재조합해보고 그랬어요. 그만큼 이 책이 어려웠어요.
대체 뭐가 그리 어려웠느냐 하면, 내용이나 문장이 어렵거나 한 게 아니에요. 역자인 성원 선생님의 번역이 너무 훌륭해서 오히려 최소 교정을 원칙으로 삼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저를 계속해서 압박했던 건, 이 책이 이미 역사적으로 심판이 끝나버린 ‘공산주의’ 체제를 다룬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체제는 이미 ‘실패’로 결론이 나버렸고 심지어 그렇게 된 지도 벌써 너무 오래됐잖아요. 이젠 주로 혐오나 조롱의 맥락에서만 소환되는, 너무도 낡아빠진 고릿적 이야기일 뿐이죠. 뭐랄까, 이미 오래전에 폐기 처분돼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사상이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페미니즘의 경우 적어도 지지자도 있고 반대자도 있지만, 공산주의라는 건 그런 것조차 아니잖아요. ‘스탈린주의’라는 귀결 탓에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유효성을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에서 이미 너무 ‘메이저’로 자리매김한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가 공산주의에 대한 책을 쓴 거예요. 맙소사. 아니, 사실 40여 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이제야 저에게 도착한 거였죠. 더 이상 알아야 할 것도,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되는 공산주의를 이렇게 제목에서부터 대문짝 만하게 강조한 책을 도대체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이 무척 컸어요. 하지만 새롭게 접하는 이 어려움을 제 나름대로 돌파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동시에 들었어요. 자신의 시대에도 이미 선고가 끝나버린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자기 자신을 온갖 수렁에 빠뜨리면서까지(이 책으로 고닉은 반공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죠) 열정적으로 책을 쓴 대책 없는 작가를 믿어보면서요. 저도 대책 없이 마주했던 것 같아요. 교정교열이 충분히 완료된 상황에서도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수차례 더 읽어보는 식으로. 최대한 이 텍스트(원고) 안에서 제가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수집하고 싶었어요. 1977년도의 책이 2024년에도 유효한 근거,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한 근거, 더 나아가 이것이 비단 공산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근거……
그러면서 제가 느끼는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어느 순간, 공산주의에 대해 이토록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저 자신의 위치가 곧 이 책을 접하게 될 많은 독자들의 위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왜 이렇게 낯설고 어려울까? 나를 비롯한 지금의 독자들과 공산주의 사이에 놓인 이 거리감의 실체는 뭘까?
제가 보기에 비비언 고닉은 이 거리감을 기민하게 알아챈 사람이에요. 그건 그가 유대계 미국인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때 그 자신도 열혈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감각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에게는 생생한 현실 그 자체였고, 그래서 정작 그렇게 급진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던 세계를 어떤 사람들이 완전히 부정하고 폄하했을 때(서부의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공산주의) 느끼게 되는 처절한 모욕감과 저항정신. 다른 한편으로 고닉은 공산주의가 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기막힌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돼요. 공산당에 가장 열렬히 몸담았던 사람들이 거기에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현실(공산당 출신의 반공주의자들). 바로 그 현실야말로 고닉에게는 반드시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최초의 동기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에 담긴 고닉의 자기서사가 이런 이중의 난감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기서 제가 진짜로 주목하고 싶은 건, 이 책이 고닉의 자기서사‘이기도’ 하지만 고닉의 자기서사‘만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말하자면, 자기서사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고닉은 자기서사로 이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우는 대신, 자기처럼 혹은 자기와는 다른 경로와 방식을 거쳐 이 운동에 몸담았던 이들의 삶을 광범위하게 추적했죠. 반공주의자들의 난폭한 수사로 한껏 납작해진 개별 공산주의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요. 페이지가 거듭될수록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이 책은 결국 ‘공산주의’에 대한 책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책이라는 걸. 전자를 말하는 것과 후자를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체제와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은 너무 쉽고 명료해요. 공산주의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이미 오래전에 종료돼버린 것처럼요. 그런데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살았던 무수한 개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 체제는 스탈린의 폭정으로 끝났을 수 있지만, 거기 속했던 개인들의 삶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니까요. 또 그 개인들이 체제가 행한 폭력에 어떤 식으로 순응하거나 저항했고, 어떤 식으로 동의/가담하거나 동의/가담하지 않았고, 그래서 끝내는 어떤 식으로 당을 떠나거나 떠나지 못했는지…… 이런 것들은 체제로서의 공산주의를 말할 때 전부 빠져나가는 것들이죠.
‘공산주의’는 하나의 체제였을지 몰라도, 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무수히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펼쳐냈어요. 이 고유한 결들을 느끼지 못한 채 그 체제의 실패를 반복적으로 읊어대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태도는 어쩌면 바로 그 ‘실패’를 제대로 분석하고 말하는 데조차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많은 반공주의 작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무언가를 놓친 것이고요. 만약 우리가 고닉처럼 공산주의를 하나의 집단적 체제가 아니라 개별 공산주의자들의 고유한 경험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을 둘러싼 언어와 질문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쯤에서 다시 ‘거리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고닉은 ‘타자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해요. 더 정확히 말하면, ‘객관성을 가장한 타자성’이죠. 책을 편집하는 내내 제가 붙잡고 의지했던 동아줄도 바로 이 타자성과 관련한 대목이었는데요. “이 거리감은 관찰 대상은 유죄이지만 관찰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묘사 행위를 묘사 대상(즉 공산당원들)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다. 마치 그들은 유아적이지만 우리는 성숙하다는 듯이. 마치 우리라면 더 잘 알았을 텐데 그들은 더 잘 알 역량이 부족했다는 듯이. (......) 요컨대 공산당원들은 더 약하고 열등한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이 겪었던 것을 우리는 겪을 리 없다는 듯이.” 여기서 고닉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건 “스탈린주의라는 무소불위의 단어”이지만, 저는 이 단어를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린 타자성’으로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어쩌면 이 타자성이라는 것은, ‘이런 시대에 공산주의라고?’ 하는 물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 책의 안위를 걱정했던(!) 저 같은 사람, 난폭한 반공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경험을 낡고 별나고 기이한 것으로 취급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비비언 고닉이 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이 책은 공산주의에 대한 책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책이고, 다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책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을 바라보는/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에 대한 책이라고요. 고닉이 그토록 탐구하고 싶어 했던 건 공산주의자들의 경험 이전에, 그에 대한 타자성이 무엇을 삭제했는지, 어떤 질문의 가능성들을 박탈했는지가 아니었을까요?
그 아득한 거리감에 끓어넘치는 ‘로맨스’로 저항하고자 했던 뜨거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이 책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궁리해보도록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주신 모래 마케터님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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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연구 분야의 최고 저작 중 한 권
음악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가? 음악은 사회적 권력과 불평등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과연 함께 번영할 수 있는가?
자유, 연대, 사랑… 사람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음악의 힘! 『음악은 왜 중요할까?』가 출간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 연대, 사랑이 왜 중요한가를 다루는 책.” “일상 문화에 대한 저자 특유의 비판적 사유와 치밀한 현실 인식이 결합된 명저.”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문화 생산의 복잡하고 모순된 관계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는 음악‧미디어 연구, 음악사회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다. 뛰어난 음악 연구자가 쓴 《음악은 왜 중요할까?》는 음악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놀랍도록 명료한 논리로 집필한 획기적인 책이자, 학제적 연구의 필독서가 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점은 음악 관련 서적으로는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분야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음악의 공공성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미디어와 문화연구, 인류학, 정치학, 철학과 미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성과와 이론을 음악에 대한 담론과 연결하여 다루고 있다. 다양한 시각에서 음악 현상을 탐구하고 싶은 이들만이 아니라 사회이론 전반에 관심이 있는 이들도 음악이라는 통로를 통해 일상과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여러 이론과 개념들, 통찰력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문사회과학계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배경으로 폭넓은 감성적 차원에 주목하면서 음악의 가치를 논한다. 저자는 특히 대중음악이라는 세속적인 음악을 주로 다루며 일상적인 영역과 공공적인 영역에서 음악이 가진 중요성에 대해 논한다.
🎼[목차] 1장. 음악, 친밀하면서도 사회적이며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2장. 느낌과 번영 2.1. 음악, 정동, 감정 2.2. 감정, 서사적 놀이, 그리고 음악 2.3. 인간의 번영, 미적 경험, 그리고 음악 2.4. 고급문화, 자기수양, 관조 너머의 음악적 가치 2.5. 음악 미학과 신체 경험: 춤추기 2.6. 일상에서의 음악과 감정에 대한 접근: 기여와 한계 2.7. 근대적 삶에서 자아실현의 문제점과 음악과의 관계 2.8. 음악을 통한 경쟁적 개인주의와 지위 경쟁 2.9. 리뷰: 음악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3장. 사랑과 성 3.1. 성과 사랑, 그리고 로큰롤 3.2. 음악, 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식 3.3. 팝-록 이분법과 록의 성정치 3.4. 전후 팝의 감정적 자원 3.5. 댄스 플로어에서의 성과 사랑 3.6. 반문화적 성적 자유에 대한 비판 3.7. 펑크, 얼터너티브 록, 메탈의 성과 사랑 3.8. 21세기 팝의 섹슈얼리티 3.9. 흑인 음악과 인종화된 섹슈얼리티
4장. 사교성과 장소 4.1. 함께하는 방식: 공공성의 형식들 4.2. 음악적 참여에 대한 찬미와 그 한계 4.3. 일체감 4.4. 일상적 사교성 I: 함께 노래하기 4.5. 일상적 사교성 II: 함께 춤추기 4.6. 함께 연주하기: 아마추어 음악가 4.7. 긍정적인 음악 사회성을 이론화하기 4.8. 자본주의 근대성의 유령 재검토: 계급과 불평등 4.9. 불균등한 음악 발전 4.10. 번성하는 음악적 장소의 요소 4.11. 전문 음악가의 직업적 삶의 질
5장. 공통성과 세계시민주의 5.1. 근대사회의 매개된 공통성 5.2. 미적 경험, 그리고 공통성에 대한 열망 5.3. 미적 경험을 되찾기? 5.4. 음악에 대한 이야기, 음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과 알려주지 않는 것 5.5. 음악, 정치, 그리고 공공성 5.6. 취향 공유 공동체? 하위문화, 신, 그리고 팬 5.7. 국가, 민족, 세계시민주의 5.8. 세계시민주의로서의 록? 5.9. 음악과 국가의 복잡성 5.10. 이상한 여정: 노동계급과 종족의 음악이 국민음악이 되다 5.11. 감상적 시민의식 5.12. 음악, 국가, 그리고 대중적인 것 5.13.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음악: 쇠락 속의 삶을 긍정하는 집단성? 5.14. 음악에 대한 비판적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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