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의 가장자리》가 출간되었습니다. 출간 전부터 많은 독자께서 저희보다 먼저 홍보에 앞장서주셨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이 책 특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담당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픽션의 가장자리》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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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의 가장자리》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 산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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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은 문학 용어로 알려져 있죠. 보통 ‘소설’로 많이 번역되기도 하고요.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냄. 또는 그런 이야기.” 이걸 보면 픽션이라는 단어가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과학 책도 하나의 픽션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회과학 또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픽션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죠.
‘상품의 비밀’을 폭로하는 마르크스의 극작법
자, 그런 면에서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한 챕터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혹시 《자본론》을 읽어봤거나, 읽어보려고 한 적이 있나요? 다들 《자본론》이 어렵다고만 느껴지지 않나요? 랑시에르의 안내를 따라 하나의 픽션으로서 《자본론》을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아, 이렇게 보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의외로 《자본론》이 참 ‘소설적이구나’ 하고 느낀 사람이 많더군요.
아무튼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랑시에르는 《자본론》을 하나의 픽션으로 다룹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시작하면서 ‘상품에 대한 분석이 우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때, 상품은 하나의 단일한 모습이 아니죠. 하나의 상품 뒤에는 거대한 이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용어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 노동가치와 노동력가치’ 등으로 상품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나가죠. 즉 상품은 수없이 변신해가는 변신극의 등장인물이고, 마르크스는 그 ‘상품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한 무대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 그 배후에 있는 모순들을 하나씩 드러냅니다. 마치 과학자가 하나씩 증명하는 것처럼요. 그러기 위해 마르크스는 많은 예시를 제시합니다. ‘옷과 아마포’에 “언어, 시선, 감정, 이성적 사유, 사랑을 부여”하고, 잉여가치의 논거를 예증하기 위해 어린 노동자들의 생활, 가난한 집의 풍경, 열악한 공장 시절 등을 죽 나열합니다. 또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논리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생산자들 사이의 직접적인 교환과 화합이 너무 ‘희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저주에 관한 해피 엔딩을 금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상품에 감춰져 있는 진실은 결코 희극으로 마무리될 수 없고,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비극의 논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랑시에르가 보기에 《자본론》에는 무대, 등장인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품들의 교환 아래 ‘감춰진 것’과 공장의 현실에서 ‘드러난 것’, 자동인형과 같은 상품들이 만들어내는 ‘환상 동화’와 공장에서 일하는 육체에 쓰인 ‘지옥으로의 서사시’ 사이의 긴장이 《자본론》에 “독특한 내러티브 구조”를 부여한다고 말이죠. 아무튼 노동자들을 수탈했고, 노동자들을 자신의 생계수단에서 분리시켰으며, 잔인한 법의 힘을 빌려 노동자들로 하여금 피를 빨아먹는 괴물에게 자신의 신체를 넘기도록 강제했다는 비밀을 폭로하는 마르크스의 극작법을 랑시에르와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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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픽션의 가장자리》를 더 알차게 읽는 방법
이번에는 《픽션의 가장자리》를 더 알차게 읽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책에 언급된 문학작품들을 하나씩 읽으면 좋겠지요.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3, 4부에 나오는 작품들은 한번씩 읽으면 좋을 듯해요. 특히 W. G. 제발트,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들을요. 아쉽게도 주앙 기마랑이스 호자의 소설은 제대로 번역된 게 없군요. 랑시에르는 제발트의 픽션에 주목해 새로운 픽션의 모델을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주앙 기마랑이스 호자의 소설을 분석하며 픽션의 정치가 어떻게 새로운 형상과 형식을 입고 변주되고, 확장되는지 살펴보거든요. 이 소설들과 함께 《픽션의 가장자리》를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 작품들을 읽지 않아도 랑시에르가 전하는 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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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좌측 상단), 윌리엄 포크너(우측 상단), W. G. 제발트(좌측 하단), 자크 랑시에르(우측 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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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옮긴이 해제’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랑시에르의 감성의 공동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최의연님의 ‘옮긴이 해제’가 자세하고 충실하거든요. 이를테면 스탕달과 발자크의 작품이 등장하는 1부 1장 〈유리창 뒤에서〉를 읽고, 그 부분의 ‘옮긴이 해제’를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 좋습니다. 그런 뒤 랑시에르가 쓴 서문을 읽으면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로는 랑시에르의 다른 책들을 함께 읽는 건데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 작업 중 대표적인 책인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불화》가 안타깝게도 현재 ‘품절’ 상태네요. 그 대신 랑시에르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추천합니다. 19세기 노동자들과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남긴 기록물에서 지적 평등을 입증하는 다양한 사례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한 스승》, 《이미지의 운명》 등을 읽으면 랑시에르의 사상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랑시에르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이란 개념을 통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끌어냈습니다. 《픽션의 가장자리》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들과 ‘임의의 순간’에 대한 분석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갑니다.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일지라도 영혼의 깊이를 지닌 주체이고, 몽상이라는 비활동이 세계의 활동과 조화를 이루는 충만한 순간이기도 한 임의의 순간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어떤 삶의 단순한 불행을 모든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임의의/보잘것없는 순간은 지배적인 시간, 즉 승리자들의 시간의 ‘승리’가 가장 확실시되었을 때조차 승리자들의 시간을 폭발시키는 힘이다. 지배적인 시간이 말 바깥, 시간 바깥에 있는 이들을 밀쳐낸 곳,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 힘은 작동한다.”(248쪽)
《픽션의 가장자리》를 만들면서 몇 번의 감동을 맛봤는데, 여러분에게도 그 감정이 가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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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 북디자인
제목 글자를 만드는 일
🎨가내수공업자
예전보다는 정말 많은 한글 폰트가 생겼다. 특히 제목용 폰트는 컴퓨터에 모두 활성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들은 언제나 폰트에 대한 갈증이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예쁜 영문 폰트들을 보면서 한글 폰트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글자를 만들어 쓰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만들기도 쉽지 않다.
표지를 디자인할 때 제목 덩어리가 안정적이면 어디에 올려놓아도 존재감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외서의 경우 개성 있는 영문 제목에 어울리는 한글을 만들어 영문 제목과 한글 제목을 한덩어리로 조합하는 모양을 좋아한다. 다른 출판사에서 그동안 만들었던 몇 가지 제목 글자를 소개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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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표지에 쓰인 것도 있고, 시안에 그친 것도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글자를 만들고 나면 그 글자를 향한 애정이 ‘뿜뿜’해져서 다른 시안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부작용이 생긴다. 그래도 요즘은 최대한 버릴 땐 과감히 버리자고 생각하지만, 최근에 디자인한 《픽션의 가장자리》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제목 글자를 만들고 나니 다른 시안이 손에 안 잡히고 자꾸만 글자로 회귀 되어 버리더라. 결국 좀 이상한 제목 글자로 표지가 완성되었다. 에라이, 평범한 것보다는 이상한 것이 낫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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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지난 레터에서 예고했던 907 기후정의행진에 다녀왔습니다. 작년 행진은 서울시청역 인근에서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강남역 일대에서 열렸어요. 그 복잡한 도심에 간다는 생각만으로 조금 지친 기분······ 간절하다, 설렌다, 벅차오른다 같은 어떤 마음을 이고 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목격하고 지켜가자는 다짐은 했던 것 같습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정말 많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3만여 명이 참여했다고 하네요. 가장 많이 보이는 피켓 문구는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였어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을 넘어 기후 불평등·부정의에까지 맞서자는 의미인데요. 처음 기후행진을 갔던 때가 생각나요. 정말 많은 단체의 깃발이 하늘을 향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 깃발에 적힌 이름들을 보며 여기엔 참 많은 불평등이 복잡하고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고 생각했고요.
사실 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나 하나의 액션은 볍씨만도 못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애석하게도 여러 결과값이 우리가 취하는 일상의 노력이 무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개인적인 편리함에 점점 더 가까이 가려는 욕망이 커질수록 나 역시 이 행성의 유한성에 가담하고 있는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럴 때면 참 자신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 배기음을 뚫고 나오는 사람들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계속해서 요구하는 그 태도가 모이면 압력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어요. 나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무결함 없이는 요구할 수 없다는 생각, 거대한 규모만이 의미 있다거나, 규모가 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끝내 우리를 멈추게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3만여 명의 사람들도 모두 개인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재앙의 지리학》의 마지막 장 문단에는 ‘요구하자’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요. 더 넓은 시선으로 보되, 좁은 구석도 함께 보는 것, 숫자 이면에 숨겨진 삶을 보는 것, 가진 지식을 뽐내기 보다 무지의 지형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나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찌르며 요구하는 것······ 이것이 기후정의행진과 《재앙의 지리학》 이 제게 알려준 당위입니다.
“더 이상 질질 끌지 말라고 요구하자. 우리 경제 속에 무언가를 감추는 뻔뻔한 작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탄소 식민주의의 종식을 요구하자.”(302쪽)
+사실 《재앙의 지리학》 표지를 크게 뽑아 피켓처럼 들고 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했고, 출발하면서 책도 놓고 나간 거 있죠. 아쉬워하던 참에 행진 장소에서 우연히 ‘들불’의 대표 구구님과 《인생샷 뒤의 여자들》의 저자 김지효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인파 속에서 마주치다니, 어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지요! 게다가 마침 구구님의 가방 속에는 《재앙의 지리학》이 있었고······😚 감사하게도 책을 빌려주시면서 멋진 사진까지 남겨주셨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모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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