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낯설게 느껴질 때
무엇보다 제목에 관한 에피소드부터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사실 책을 만들며 독자들의 피드백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제목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한국사회 최초의 시설 폐지(향유의집)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원고였지만, 어쩐지 제목만큼은 그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유의집의 자진 시설 폐지와 탈시설운동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상기하되, 그것이 선언의 형식보다는 일상의 구체적인 소재나 대상과 연관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으면 했죠. 특정 순간에 더 강하게 천착하는 선언의 형식과 다르게, 시간과 지속성, 과정 같은 것이 묻어나는 제목이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정민구 활동가님이 “나를 향유하러 가는 길”이라는 제목을 제안하셨고, 인권기록센터 사이의 박희정 선생님께서 그 제목을 “집으로 가는 길”로 발전시켜주셨죠. 이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무조건 ‘이거다’ 싶었습니다. 사실 원고를 읽는 내내 혼자서 머릿속으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떠올렸었거든요. 그런 느낌이면 좋겠지만 그 제목을 그대로 쓸 순 없고, 이렇다 할 해답 없이 막힌 상황이었는데, 박희정 선생님께서 제대로 뚫어주신 거죠. 찌릿, 전기가 흘렀습니다.
너무 길어서 정식으로 채택하진 못했지만, 필자들과 저 사이에 통용되는 제목은 “집으로 가는, 가깝고도 먼 길”입니다. 탈시설 당사자분들의 멀고도 험난했을 여정을 떠올리며 만든 버전으로, 최종안에서는 “집으로 가는”과 “길” 사이에 쉼표를 넣는 것으로 ‘가깝고도 먼’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죠. 최근에는 제목에 붙은 이 쉼표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펴주신 귀인이 나타나기도 했어요. 바로 SHARE(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의 김보영 사무국장님입니다. “왜 여기에 쉼표가 필요했을까? 나는 어쩐지 이 책에 나온 탈시설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 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으로 가는, 길’이 쉼표 없이 매끄럽게, 한 번에 통과하기는 어려운 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상대적으로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은 평범하다 못해 흔하고, 동명의 소설과 영화도 여러 편 있습니다(그래서 검색도 어렵다는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이 마음에 꼭 듭니다. 다른 제목은 상상할 수가 없네요. 이 제목을 보고 있으면,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평범하지 않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지거든요. 그 흔하디 흔한 집 혹은 자기만의 공간이라는 것, 모든 사람이 일과를 끝내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그곳을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도 가도 못한 이들이 상상 외로 너무나 많습니다. 집은 당연한 것도, 평범한 것도 아닙니다.
* 김보영, <‘자기만의 집, 자유롭고 위태로우며 기쁘고도 슬픈 자기만의 삶’: 《집으로 가는, 길》 서평>, 셰어 이슈페이퍼, 2022. 5. 3
🔖 길: 이것은 길인가, 등고선인가
‘집’에 대해 한참 뜯어보았으니, 이제 자연스럽게(?) ‘길’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그러려면 《집으로 가는, 길》의 초록 표지를 관통하는 그 길을 짚지 않을 수 없겠죠? 그런데 무지갯빛의 가느다란 선으로 표현된 그 길은 사실 좀 이상합니다. 저랑 같은 생각 하시는 분이 있는지 궁금한데, 암튼 저에게 그 선은 평범한 길의 형상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뭐랄까요, 굴곡이 너무 심합니다. 곡선이지만 곡선 특유의 유함도 딱히 없고,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라기보다는 해발고도와 지형의 기복을 표현한 ‘등고선’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 표지를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이 듭니다. 표지의 저 격한 곡선은 탈시설 당사자들의 멀고도 험했을, 아니 앞으로도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 모를 위험천만한 여정을 짐작해보도록 합니다. 지난 4·20 장애인차별철폐의날 특집호의 인터뷰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요. 탈시설 당사자와 운동가들은 흔히 탈시설을 ‘기본값’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불온하고 급진적인 사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본값’ 말입니다. 참 의미심장한 해석이죠. 이 말인즉슨, 탈시설 이후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탈시설을 이룩하기까지의 과정만큼이나 어렵고 지난하며, 비정하다는 뜻입니다. (시설폭력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과 사과, 24시간 활동지원 체계, 지원주택, 이동권은 물론, 차별 없이 교육받고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 등과 같은 제도적 기반이 여전히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실에서 탈시설은 그 자체로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지난한 투쟁의 시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나 필자들이나 출간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답답함과 먹먹함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네요. 특히 지난 4월 19일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 2000여 명이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외치며 삭발투쟁을 벌였을 땐 더더욱 그랬죠. 앞으로 얼마나 더 험난한 여정이 이어져야 장애인들이 탈시설이라는 ‘기본값’을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갈 길이 아직도, 여전히 멉니다.
🔖 불순물: 아름다운 결과물의 아름답지 않은 과정
이제 조금 더 책 내부로 들어가볼게요. 아, 그런데 어쩌죠. (《변신하는 여자들》에 이어) 이번에도 불순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제가 저도 모르게 불순물들을 애정하는지도요. 《집으로 가는, 길》에도 만만찮은 불순물이 있었죠. 탈시설을 이룬 당사자가 여전히 탈시설에 유보적인 입장이라면…… 어떠시겠어요? 그런 민감한 언어들을 탈시설운동의 노고와 성과를 조명하는 책 안에 포함시켜도 되는 걸까? 그게 탈시설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면 어쩌지? 탈시설을 향한 비난에 손을 보태는 일이면 어쩌지? 이런 고민들을 끝까지 놓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편집자라면 으레 그런 불순물을 걸러내고 싶은 욕망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고 필자들은 그것을 걸러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그것과 잘 관계 맺어보기로 했죠. 지금에 와서 감히 말해보건대,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끈한 결과물만을 강조하는 편집 방식은 이 책의 취지에 가장 반하는 태도일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에 《집으로 가는, 길》의 고유한 정체성은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아름답지 않은 과정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제가 이 책을 한없이 애정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세상은 아름답고 대단한 것들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과정은 사실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거기엔 아름다운 ‘결과물’엔 잘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실패와 절망, 함께하는/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첨예한 이해관계와 긴장들이 있죠. 그런 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역사적인 첫 탈시설 성공 사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탈시설이라는 대단한 성과 뒤에 자리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순간들을 그러모으는 독특한 기록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실패한 지점을 여과 없이 되짚고 성찰하는 사람은 매우 귀하고 드물며, 언제나 멋있습니다. 이 세상 쿨함(?)이라고 볼 수 없는 이런 태도는, 책 맨 뒤쪽 ‘부록’ 파트에 실린 향유의집 직원 집담회(홍세미 정리, <향유의집 폐지, 그 이후>, 314~335쪽) 글에 넘치다 못해 흐르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부록에 넣었지만, 절대 부록 아니고 메인이니까 꼭 보시길요 : )
“시설에서 살 때랑 큰 변화를 모르겠는 것 같기도” 하다며 자립생활에 대한 솔직하고도 복잡한 마음을 표현한 양남연님, 탈시설을 조력한 향유의집 직원들을 향해 애틋함과 신뢰를 드러내면서도 “아무래도 거기(시설) 있을 때가 더 좋았”다며 쓴소리를 내뱉는 이정자님의 이야기를 책에 담은 것, 그리고 그 이야기와 더불어 향유의집 직원분들의 시설 폐지 이후 집담회로 책의 문을 닫은 것이 저는 2022년 4월의 저와 필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기댈 수 있는 건 독자분들의 섬세한 독해뿐입니다. 탈시설 당사자들이 내비친 복잡한 마음들이 탈시설운동이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길을 지시하는 이정표로 읽힌다면 좋겠습니다. ‘거봐, 그래서 탈시설은 안 되는 거야’라는 손쉬운 단정 말고요.
🔖 현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그래서일까요? 《집으로 가는, 길》은 저에게 계속해서 끝나지 않은 책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이상한 말이죠. 2000부의 책이 찍혀서 전국에 퍼져 있는데 끝나지 않았다니. 하지만 저에겐 이미 변경이 불가능한 하나의 완성품이 된 이 책보다, 출간의 기쁨을 뒤로하고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가는 탈시설 당사자들의 외침이 더 선명합니다. 그중엔 탈시설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테고요.
책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금의 이 내용과 형태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현실에선 이미 수 갈래의 또 다른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많은 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 또 그 길 위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아 아주 기쁘고 또 묘합니다. 편집자한테는 정가와 ISBN이 찍혀 나오는 ‘책’이 어떤 작업의 끝일지 모르겠지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문제니까요. 참으로 새삼스러운 진실입니다만, ‘책’이라는 게 어떤 사람들의 급변하는 세계를 담아내기에 얼마나 좁은 그릇인지를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 같네요. n번째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이 책의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질 다음, 그다음의 변화들을 상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의 순항과 탈시설운동의 격변을 응원하며, 5월 23일부터 5월 26일까지 열리는 국회 탈시설 전시회 <우리 함께, 살아나간다>의 풍경을 짧게나마 전합니다. 전장연과 발바닥행동,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가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촉구를 위해 마련한 전시회예요. 국회의원회관 로비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전시회에 《집으로 가는, 길》과 《나, 함께 산다》 《숫자가 된 사람들》 책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좀 울컥하더군요. 이재인 작가님의 인두화로 재탄생한 탈시설 당사자들의 메시지와 한종선님(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이 오로지 유년시절의 기억에 의존해 수개월에 걸쳐 제작한 형제복지원 건물 모형은 서로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전시였습니다. 혹시 26일까지 국회 근처를 지나실 일이 있다면, 꼭 한번 들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