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화 읽기→ 5화: 가진 무기로 싸워라
적정 코미디 기술
출간 전 연재 6화: 관객을 그리로 데려가세요
📩 금개 지음
연애 리얼리티 쇼 〈솔로지옥〉의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면 지나가다 본 체육관의 상호명이 떠오른다: ‘헬스보이 필라걸’. 이성애 규범에 충실한 각종 ‘보이’와 ‘걸’들이 육체미를 뽐내는 장면은 어쩐지 남사스럽다. 〈솔로지옥 4〉 초반에는 육체미 대결에서 우승한 ‘보이1’이 첫인상만 보고 ‘걸1’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보이1’과 눈이 마주치자 ‘걸1’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환히 웃는다. ‘보이1’ 역시 웃음으로 화답하며 ‘걸1’을 ‘천국도’(고급 호텔)로 데려간다. 이런 이성애 가득한 장면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홍진경은 이런 시청자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패널이다. 그는 웃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프린트된 노란 니트를 입고 말한다.
“지금 저기서 웃긴 상황이 뭐가 있어? 한 개도 없어.”[1]
홍진경이 정확히 짚은 것처럼 사람들은 웃길 때만 웃지 않는다. 메릴랜드주립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일상에서 발생하는 웃음의 70퍼센트가 인사할 때 나온다고 한다. 인사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웃긴 상황이 뭐가 있겠는가? 어색해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또는 그저 습관적으로 웃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와 달리 코미디 무대에서는 관객이 웃겨서 웃는 편이 좋다. 공연자의 의도대로 웃어야 한다는 뜻이다. 코미디는 단순히 웃음을 발생시키기 위한 웃음치료가 아니라, 관객이 어떻게 웃을지 경로를 디자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담의 성공 여부는 결국 관객이 웃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더 나은 농담을 만들고 싶다면, 그 웃음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한 ‘아하하하^^;;’인지, 연대와 응원의 ‘옜다 웃음’인지, 트라우마 반응으로 비명처럼 튀어나온 웃음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만 필요하다. 관객들이 웃거나 웃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길을 잘 추측하고 읽어내는 코미디언은 고수라고 볼 수 있다.
내 특이한 취미는 아마추어들을 무대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웃음의 경로 디자인에 서툴 수밖에 없는 공연자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주는 행위다. 정기적으로 〈퀴어 코미디 오픈마이크〉를 개최해 소수자임에도 관객을 웃기고자 하는 기특한 공연자들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자의 머리카락 길이가 짧을수록, 소수자성이 짙어 보일수록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사전에 대본은커녕 공연의 소재조차 공유받지 않는 위험한 무대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어서다. 소수자 코미디언들이 무대에서 흔히 겪는 실패를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다.[2]
실패 사례 #1. ‘셋업-펀치라인’ 구조 없는 ‘썰 풀기’
코미디의 기본 구성은 ‘셋업-펀치라인’이다.
◎ 셋업(set-up): 관객이 상황을 이해하고, 웃음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과정
◎ 펀치라인(punchline):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깨뜨려서 강한 반응(주로 웃음)을 유발하는 부분
- 펀치라인은 반전, 과장, 반복, 엉뚱한 연결, 의외의 솔직함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대본을 ‘재밌는 에피소드의 나열’, 즉 ‘썰 풀기’로 구성하는 경우 코미디의 기본 구성을 놓치기 쉽다. 셋업을 통해 슬슬 예열하다가 펀치라인으로 강하게 치는 행위의 세기를 표현하자면 ‘약-약-약-강-중강약’ 정도의 구성이다. ‘썰 풀기’는 대부분 ‘약-중-중-중-중-약’ 정도로 마무리되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어렵다. ‘언제 웃어야 하지?’라는 긴장감 섞인 웃음만을 선물하게 된다. 셋업을 통해 관객을 어딘가로 데려갔다면, 펀치라인은 웃음으로 관객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다. 펀치라인이 없으면 관객은 농담의 끝을 찾지 못하고 혼자 구천을 떠도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특별한 경험담을 듣는 건 대체로 즐겁다. 다만 일시정지나 빨리감기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코미디 무대에서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듣는 게 낫다. ‘네이트판’이나 ‘썰 유튜브’에 들어가 규범사회 뒷구멍에서 일어나는 각종 익명 사연을 접하는 것이 도파민을 자극하는 데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더 퀴어한 썰을 원한다면 팟캐스트 〈생방송 여자가 좋다〉의 각종 유성애 사연들을 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누구한테도 말 못할 사연들이 재밌어지는 이유는 진행자들이나 댓글과 채팅창의 반응이 합심하여 입체적인 재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기명으로 경험담을 나누는 것은 피차 당황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실패 사례 #2. ‘엽기’의 역치가 관객과 어긋남
초보 코미디언들은 '자극적일수록 좋겠지’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성적인 단어나 욕설을 일부러 섞어 과장하는 식으로 말이다. 본인이 겪은 ‘엽기적인’ 썰을 푸는 경우도 많다. 칼럼니스트 복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엽기’는 ‘상식적이지 않은’, ‘거부감이 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든 것을 묶어주는 단어다.[3] 문제는 이 엽기성의 기준이 공연자 본인에게 있다는 것인데, 다음 양극단의 관객을 만난 경우에 모두 곤란해진다.
◎ 관객을 얕잡아 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소수자 관객일 경우
- “마! 니 으데 가서 이런 거 못 문다 아이가!” 하면서 타피오카 된장찌개[4]를 끓여왔는데 관객들이 이미 지난 학기에 다 먹어본 음식이라면? 관객은 ‘네 그래서요?’, ‘아 진짜요?’, ‘그렇구나……’ 정도의 반응에 머무르게 된다.
- 나의 스탠드업 코미디 데뷔무대는 여성 우울증을 다룬 하미나 작가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북토크 자리였다. 이날 내 공연은 관객 한 명이 추후에 “웃기기보다는 슬펐어요……”라는 피드백을 주었을 정도로 코미디 무대로서는 실패에 가까웠다. 공연의 내용은 대부분 잊었고 당시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아차 싶었던 순간만 기억난다. 농담 안에서 ‘심한 정신병’이 어느 정도인지 잘못 세팅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객석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동료의 병세 짙은 눈을 마주친 이후였다.
◎ 관객을 과대평가하다: 정상 규범에 의해 과하게 보호된 다수자 관객일 경우
- “여러분! 이런 특식 좋아하시죠?” 하면서 타피오카 된장찌개를 끓여왔는데 관객들이 경악하고, 슬퍼하고, 연민한다면? ‘저런……’, ‘헐 어떡해’, ‘괜찮아요?’ 같은 반응에 공연자는 관객을 두고 다음 농담으로 쓸쓸히 떠나게 된다.
- 나의 동료 퀴어 코미디언은 두둑한 페이와 정상성에 홀려 압구정에 위치한 코미디 바의 섭외를 수락한 적 있다. 압구정의 보이와 걸들은 무대에 성소수자가 오른 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신비한 체험이라도 한 듯 반응했고, 동료는 ‘프릭쇼’[5]의 ‘프릭’이 되어버린듯 몹시 불쾌했다고 한다. 이 경우는 된장찌개를 끓이기도 전에 무대가 끝나버렸다고 볼 수 있다.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엽기로 여긴 나약한 관객들 탓이다. 관객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코미디 쇼에 온 관객은 공연이 웃기지 않으면 ‘이거 코미디 맞나……? 왜이렇게 피곤하지?’라는 생각에 공연자와 점점 멀어진다. 공연이 끝날때쯤엔 공연자와 관객이 아예 다른 길목에 서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코미디언은 웃음의 경로를 어떻게 디자인하는가? 내가 알기로는 도파민 중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롤러코스터 트레일 같은 것을 만들고 안전장치도 충분히 준비한다. 어떤 구간에서는 천천히 긴장감을 주고, 거의 자유낙하하는 짜릿한 충격을 줬다가 결국 의도한 방식으로 웃음에 이르게 한다. 최근 상당히 감명받은 성공 사례들을 함께 제시하겠다.
성공 사례 #1. 〈부산 퀴어 코미디 서울 습격〉 전인: 자살한 친구로 웃기기
나는 부산이 좋다. 부산 여자들은 아무리 펨이여도 조금씩은 부치이기 때문이다. 일단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면 부치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도시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더 여자가 되는 게 짜릿해서 주기적으로 부치광역시에 방문한다.[6] 부산의 특산물(부치)이자 나의 활동가 동료 전인은 퀴어문화플랫폼 ‘홍예당’에서 ‘퀴어 코미디 스터디’를 운영해 〈부산 퀴어 코미디 습격(부퀴코습)〉이라는 공연을 올렸다. 나는 이 공연이 몹시 궁금했으나 진행자로 섭외해주지 않아 약간 삐져서 부산행 KTX 티켓을 구매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로 이 공연을 데려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연이 〈부산 퀴어 코미디 서울 습격(부퀴코서습)〉이다.
〈부퀴코습〉(11월)과 〈부퀴코서습〉(1월) 사이, 12월에 전인은 10년지기 활동가 동료 오기를 보내야 했다. 서울 공연에서 전인은 오기의 죽음을 대본에 추가했다. 대본을 받고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무대 위에서 그가 대본을 구현하는 방식을 보고 완전히 감탄했다. 그는 관객을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했다. 아직 본인에게 슬픈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완성도 높은 코미디 무대를 마친 비결은 그가 낙차를 활용하는 기술에 있다고 생각했다.
전인은 부산 사투리 네이티브라는 장점을 살려 서울 관객에게 “사투리 함 해드릴까예”라고 묻는다. 이어서 “바~로 이 맛 아닙니까!” 하는 90년대 슬랩스틱 코미디언처럼 굴며 익숙한 웃음을 유도한다. 그러다 갑자기 “저는 가정폭력 생존자입니다”라면서 관객이 순식간에 낙차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차근차근 셋업을 쌓아올린다.
“아빠로부터 엄마를 지키기 위해 몸이 커지고 싶었는데……”
퀴어 관객이 웃을 수밖에 없는 펀치라인이 이어진다.
“가슴이 커지더라고요.”
관객은 다시 그의 통제권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개그콘서트식 유행어를 만들려는 시도로 실없이 말장난을 이어가다가, 관객이 방심한 순간 다시 떨어뜨린다.
“지난달에 제 10년지기 친구가 자살로 죽었습니다.”
셋업으로 조금씩 길어올리는 과정:
“죽은 친구와 저는 함께 활동하는 10년 내내 싸웠습니다. 서로 니 말이 맞네, 내 말이 맞네…… 이제 알겠어요.”
낙하한 관객에게 펀치라인을 펼쳐주는 순간:
“사실은 제 말이 다 맞았죠. 억울해도 반박 못하죠?”
성공 사례 #2. 〈코미디캠프 2023: 관찰〉 안담: 강간 농담 성공하기
안담은 여러모로 고수다. 섬세하게 이야기의 구조를 설계하는 작가이자 대담하게 관객의 반응을 실험하는 퍼포머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코미디캠프 2023: 관찰〉 무대는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 공연은 노출 콘크리트 카페식 구성을 가진다. 코미디의 ‘셋업-펀치라인’이라는 구조와 이를 구현하는 과정 자체를 무대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관객이 어디서 얼어붙고 해소되는지를 예측하고 직접 확인하게 만드는 코미디에 대한 코미디였다.
안담은 인문잡지 《한편》 16호 ‘유머’에 기고한 〈강간 농담 성공하기〉에서 이 공연을 준비하며 가졌던 질문을 공유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야말로 좋은 농담이 되곤 한다면, 강간도 그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걸 궁금해하는, 심지어는 관객 앞에서 기꺼이 취약해진 상태로 힘의 역동을 실험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매우 흥분시킨다. 이 미친 여자의 섹시한 실험 덕에 관객에게 드리워진 ‘강간’이라는 단어의 힘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공연에서 강간 농담은 대부분 웃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의도된 실패는 성공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작가됨과 코미디언됨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며 관객을 편안하게 만들다가 코미디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그러다 꼭 성공시키고 싶은 농담이 있다며 이 구절을 읊는다.
저는 열 여섯에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직도 악몽을 꾸는데요.
어제 꿈에도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어요. (셋업)
그 악마같은 새끼가 지스팟만 피해서 찌르더라고요. (펀치라인)
객석에서 크고 작은 반응이 나오지만 시원하게 푸하하 웃는 사람은 소수다. 공연자는 관객의 반응을 관찰하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완성한 저의 첫 소설 《소녀는 따로 자란다》, 12월 13일 출간되었습니다”라며 책을 홍보하는 너스레를 떤다. 관객들은 그제야 안심한듯 웃는다. 이내 안담은 관객을 달래듯 방금 던진 농담의 셋업과 펀치라인 구성을 직접 설명한 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첫 강간 농담의 기억이 희미해져갈 때 즈음, 의도적으로 실패하도록 설계된 농담을 뜬금없이 다시 불러낸다. 기막힌 타이밍에 한번씩 소환된 강간은 공연 후반부에 이르러 실없는 펀치라인으로 전락하고, 이는 역설적으로 관객을 무너뜨린다.
안담은 공연을 회고하며 “웃음을 탐구하는 사람은 사실은 힘의 문제를 탐구하는 게 아닐까”라며 다음과 같은 도식을 그린다.
- 힘을 너무 많이 가진 사람: 폭력적이 됨
- 힘을 너무 적게 가진 사람: 슬퍼짐
- → 두 경우 모두 비극
- → 그 사이 어드메에 희극이, 웃음이 있음
무대에 선 사람에게는 힘이 있다. 슬픔과 폭력 사이, 어디에 웃음을 배치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 말의 세계에선 뭔가를 한없이 축소해서 집어 던졌다가 다시 부풀려 그 안으로 들어가보는 게 가능해진다. 그것이 일상의 엽기 사건이든, 친구의 자살이든, 강간이든 간에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어난 일을 ‘썰 풀기’식으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의도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원하는 곳으로 관객을 데려가야 한다. 이 놀이를 위해서는 사건을 해체해 신의 관점에서[7] 내려다보고, 동시에 전혀 상관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창작의 과정에서 우리는 서사의 주체가 된다. 현실에서 나에게 남은 힘이 미약할지라도.
평생 코미디 무대와는 연이 없다고 생각할 독자에게도 심심할 때 추천하는 활동이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가상의 관객에게 가장 큰 폭으로 낙차를 경험하게 할 만한 일일수록 좋다—이야기를 뜯어서 셋업과 펀치라인 구조로 만들어보길. 트라우마적 경험을 치유하는 데 별 효과는 없을 수 있겠으나 재미는 있을 수 있다. 혹은 이런 말을 떠올려봐도 좋겠다. 현실을 재구성한 텍스트 이후의 세계는 변화한다고. 하나의 이야기가 더 보태진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같지 않다.[8]
[1] 이 대사와는 상반되게 활짝 웃고 있는 홍진경의 니트와 자막을 함께 캡처한 짤이 SNS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2] 여기서 실패란 무대 바로 옆에서 분위기를 관찰한 호스트(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공연 전체에 대한 피드백이라기보다는 순간의 정적이나 그것이 수습되지 않은 채 끝난 경우에 대한 회고이다. 일단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 자체가 성공의 경험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기꺼이 무대에 오른 여러분의 시도와 용기로 완성된 공연이니, 부디 참여해준 코미디언들의 기분이 상하거나 기운이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여러분이 계속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또 다른 무대를 만들테니 봐달라.
[3] 복길,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잘 가 너무나 사랑했었어, <잘가> (더 자두, 2001)〉, 《씨네21》, 2024.11.21.
[4] 웹툰작가 김케장의 ‘케장콘’ 짤에서 가져왔다. “니 으데 가서 이런 거 못 문다 아이가!”라며 ‘타피오카 된장찌개(8000)’를 내놓는 사람1을 보며 사람2가 ‘그렇겠죠……’라고 생각하고 있는 짤이다.
[5] 프릭쇼(Freak Show)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에서 유행한 공연 형식으로, 장애인, 기형인,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괴상한 볼거리’로 전시하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쇼였다.
[6] 부치, 펨, 부산 페티시에 대해 전부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해한 사람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걸로 하자.
[7] 이랑, 〈신의 놀이〉, “난 좋은 이야기를 통해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8]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박씨,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