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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코미디 준비 자세: 지각하지 마라(네가 교사라면 더더욱)
“10분 늦을 것 같습니다. 출석체크 대신 부탁드려요ㅠㅠ”
업무 메신저의 [근무상황] 채널에 타이핑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심장이 또 너무 빨리 뛴다. 그냥 지하철이 이대로 영원히 멈추길 바라면서 전송 버튼을 누른다. 침을 삼키고 이를 꽉 깨문 채로.
교사는 돈 많이 못 버는 연예인이라 했다. 학생들은 가정 밖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어른에게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고 하필이면 나를 만나게 됐다.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다. 지각한 날에는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가상의 광대가 팡파르를 터뜨리고 소녀시대처럼 전 세계가 우릴 주목한다. (우리 학교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캠퍼스로 사용해 모든 공간이 투명 유리창이거나 개방되어 있다. 즉 조용히 밀입국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교사가 지각을 할 수 있나요? 저걸 교사라고 할 수 있나요? 저런 사람에게 누가 뭘 배울 수 있나요? 방음 안 되는 오피스텔 벽 너머로 들려오는 절대 꺼지지 않는 알람소리처럼 스스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이 목소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주제에 학생들에게 늦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고역이다. 헐레벌떡 도착해서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면 개인 메시지로 상사가 보낸 메시지.
“이번 달 벌써 세 번째입니다. 출근 시간 잘 지켜주세요.”
혹은 교무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할 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하는 말.
“회의 끝나고 잠시 얘기 좀 하시죠.”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여기는 학생들도 있으니 그들의 신뢰까지 잃게 되는 겁니다. 편찮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여긴 회사니까 사무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에서 꼭 이야기해보세요. 네…네…. 넵.
성취강박/고기능/ADHD의 지각에는 악순환 고리가 있다.
지각 → ‘기본적인 것도 못 지키는 사람’이라는 자책 → 위축됨 → 업무 성과 저하 → 성취감을 느끼지 못함 → 자신감 하락 → 성취욕과 인정욕구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 일을 벌임 → 벌인 일까지 소화하려다 체력이 떨어짐 → 새로운 일에서 실제로 뭔가 성과를 얻기 때문에 그만두기 어려워짐 →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잠을 더 못 자게 됨 → 수면의 질이 낮아지고 기상하면 공황이 옴 → 지각(*반복)
노동을 돈으로 교환받는 입장에서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이걸 모르는 건 아닌데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 납득이 잘 안 갔다. 나는 남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좋은 활동가였고 가끔 재밌는 농담을 한다. 그러나 지각을 하는 게 나쁘다는 당연한 사실에까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사회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슬프게도 좋은 조직원, 동료, 교사 반열에 오르는 합격 목걸이(그런 건 없다……)를 받지는 못하게 되는 셈이다.
지각 문제에 대해서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상담에서도 엄중하게 다뤘다. 사회의 질서와 불화하는 나의 은밀한 신념은 이런 식이었다. (과거형이니 너무 화내지 마시길……)
지각이 그렇게 나쁩니까?(탕웨이 화법) → 지각 문제 때문에 나를 손절하려 했던 사람들의 입장을 들어봄 → ‘지각하는 것은 타인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태도’ → 시간이란 게…… 그렇게 소중합니까? → 사회의 입장: 당연하죠 → 헉 그렇군요 저는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며 살고 싶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살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것도 힘든데……. → 지각이 그렇게 나쁩니까? (*반복)
나의 네 번째 연상녀(상담 선생님)는 이렇게 표현했다. “혜지씨 안에서 진보와 보수 세력이 싸우는 것 같아.” 보수세력의 골자는 20세 전까지 부모님과 교회가 원했던 ‘목적이 이끄는 삶’이다. 타의 모범이 되는, 글로벌 인재가 되는, 아름다운 연애를 하고 대접받고 사랑받고 결혼하고 아기 낳고 남들 수입만큼을 십일조로 헌금하는 삶을 주된 목표로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과정은 성실해야 하고, 결과는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만큼 빛나야 한다. 나는 제법이었다. 서울에 오기 전까지,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까지, 강간당하고 임신중절하기 전까지, 여자 애인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이후 등장한 진보세력은 정신과 약 먹고 누워 있는 것이 주요 일과지만 매우 강경하다. 보수적 가치에 대항하는 싸움을 내 안의 노사갈등으로 본다면 진보 쪽은 금속노조 혹은 건설노조 느낌으로 강성이다. 이들은 항시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 핵심 정서는 여차하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이다. 진보세력은 묻는다.
왜?
왜 일해야 하지? 왜 돈 벌어야 되지? 왜 내 생활과 패턴을 직장에 맞춰야 하지? 왜 나를 빼고 만들어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왜 세상이 엉망인데 내가 노력해야 하지? 왜 살아야 되지? 여기에 명확한 답이 없으니 (있었는데 없어진 건 원래 없었던 것과는 다르다) 모든 당위를 질문들이 이겨버린다. 계약이야? 어쩌라고 나 죽고 싶어. 약속이라고? 어쩌라고 나 죽고 싶다고…… 나를 괴롭히는 상황들의 먼지를 털어내 깊이 파고들면 아래께에는 공통적으로 원망과 억울함이 있었다. 삶 자체에 대한 원망, 살아 있음에 대한 억하심정. 나는 이미 너무 상처받았고(모든 것에, 인생에, 죽은 사람들에게? 내 자신에게) 그 상처는 회복된 적 없는 채로 인생이 돌아가고 있었다. 상처 위에 상처를 덧내며 무리하게 생활하는 방식으로. 내가 〈인생 살기〉의 빅 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마음을 언어화하고 나서는 조금 놀랐다.
나는 살아가는 게 억울하다, 나는 삶을 원한 적 없다, 나는 살아 있고 싶지 않다.
헐……
여태 회피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놓으니 황당한 동시에 어쩐지 마음이 좀 편해졌다. 교직원 대상 비폭력대화 워크숍에서 갈등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살짝 인정하기’ 기법을 배운 적 있다. 납득 안 되는 의견에 완전히 동조하지도, 완전히 반대하지도 말고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기법이었다.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살짝 인정’하니 그제야 나의 살고 싶지 않음에도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진짜 그런가? 나는 정말 살아 있는 게 싫은가?
살아 있음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강아지의 냄새와 촉감, 언제 다 볼까 싶게 많고 대박 훌륭한 작품들, 굳이 사는 이유는 이런 거다 싶은 순간들, 내가 나보다 사랑한다고 믿게 되는 사람들, 걔랑 나만 아는 농담.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만 가진 좋은 점을 찾아내고 사랑에 빠지고 타인을 통제하거나 소유할 수 없음에 분노하고 애먼 사람을 질투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스스로를 탓하고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재밌다. 얼마나 재밌냐면…… 다른 건 전혀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근데 나는 자주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고통도 없고 삶도 없는 상태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존나 피곤했다. 그런 피로감 안에서 생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냥 뇌와 심장에 늘 안개가 낀 느낌으로 하기 싫은 걸 겨우 해냈다.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 위주로 삶이 구성되면 사람은 억울함에 잡아먹힌다. 하고 싶은 걸 하는 비율을 늘린 지금은 좀 달라졌다. 하여튼 덜 피곤하고 전반적으로 덜 괴롭다. 어떤 계기로 달라졌는지 뾰족한 비결을 알려줄 수 있다면 자기계발서로서 더없는 영광이겠지만 죄송하게도 그런 건 딱히 없다. 그냥 시간이 지났다. (life happened……) 시간이 약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어른 대열에 합류해서 송구하다. 그나마 노력에 의한 요인을 찾자면 꽤나 적성에 맞는 일로 돈 벌어서 중고차 한 대 값을 상담 비용으로 지불한 것이 주요했다고 본다. 이외에도 부모님께 커밍아웃하고 손절 안 당하기, 친구들과 애인한테 패악질 부리고 손절 안 당하기, 정신건강 유료구독(정신과 약 꾸준히 먹기), 신체건강 유료구독(PT 받기), 계속 창작하면서 창작자 친구들한테 정서적 지지 받기 등등이 있겠다. 스스로를 실험 대상처럼 대하면서 언제 기분이 좋고 나쁜지, 어떤 환경에서 진짜로 휴식할 수 있는지 관찰했다. 삶에 남아 있는 미련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다가 나와 이효리 선배님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것도 도움이 됐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