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2007.
이 책은 저에게 ‘문턱’ 같은 책으로 기억됩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면서도 어떤 단절을 상기시켜주는 문턱이요. 이 문턱을 기점으로 한편에는 ‘장애’ 따위는 자기와 무관하다며, 따라서 알 필요조차 없다고 단언하는 비장애중심적 세계가 펼쳐져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런 비장애중심적인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싸움을 벌이는 거칠고 시끌벅적하고 열띤 세계가 있었죠. 이 책은 저에게 자신을 밟고서 이 세계로 건너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게 곧 노들야학과의 첫 대면이었어요. 이 책을 읽고 당시 노들야학이 기획한 탈시설 워크숍에 가게 된 저는 거기서 그때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도발적인 장애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한 명 한 명의 운동가들은 제가 아는 자명한 세계가 어떤 존재의 삶을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무시무시한 폭력에 기초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뜨거운 언어와 몸짓으로 알려줬죠.
그로부터 10년쯤 지나 편집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오래된 이 책이 불현듯 제 눈에 들어왔어요. 그 순간, 노들야학이라는 공간에 꼭 다시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소용돌이쳤습니다. 갑작스럽고 터무니없었던 그 생각 덕택에 《나, 함께 산다》 《장애학의 도전》 《짐을 끄는 짐승들》 같은 어마어마한 책들과 만나고야 말았고요.
‘장애’와 관련한 책들이 한 해에 열 종 이상씩 쏟아져 나오는 지금에야 비판적 장애학의 관점이 어느 정도 최소한의 지식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장애라는 것이 어떤 손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장애를 차별하는 특정한 관점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장애인’이라는 범주 자체에 깃든 지배적 권력/규범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통찰은 이 책이 처음 출간되고 한창 읽히던 2007~2009년에만 해도 매우 귀하고 드물었습니다.
오래된 이 책을 여전히 중요하게 참고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이 책으로 장애 문제를 처음 접한다면, 아마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게 될 거예요. 인류의 역사 내내 지속되어온 그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더 탐구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게 될 겁니다.
2.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이마즈 유리·장한길 옮김, 오월의봄, 2020.
이 책의 가치와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한 과제로 느껴집니다. 3년 전 이 책의 편집을 마무리했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요. 이 책의 급진성에 대해 매번 새롭게 깨닫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최근 이 책을 다시 펼쳐들었을 때 새삼 밟혔던 것은 수나우라 테일러가 던지는 여러 질문들이었어요. 이 책을 가장 이 책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런 질문들의 다발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흔히 사람들은 ‘서론-본론-결론’과 같은 식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날카롭게 번뜩이는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이 됩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지어 올리는 책은 누군가의 삶에 아주 깊숙이 침투하기 마련이죠.
이를테면 테일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원숭이는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동물인데, 어째서 자신의 걸음걸이를 ‘원숭이 같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칭찬이 아닌 모욕이 되곤 했는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틔워온 이런 질문들은 점차 장애를 가진 인간과 비인간 동물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되었으니, 그 결과물이 바로 《짐을 끄는 짐승들》입니다. 테일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질문을 한층 더 심화합니다. “과연 자기 자신이 동물임을 자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혹한 현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역사를 알고 난 후에도 내가 동물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 동물화가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이 끔찍한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종차별주의가 다른 종들에게 가한 폭력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저는 이 책을 만나며 질문의 힘이라는 것이 대단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평범하고 천연덕스럽게 우리의 일상에 자리하고 있어 그 누구도 눈여겨보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 그렇기에 한 번도 질문으로서 건져 올려진 적이 없었던 것들을 정확히 바라보는 힘. 제가 보기에 《짐을 끄는 짐승들》은 철저히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이 책 덕택에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움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앨리슨 케이퍼,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이명훈 옮김, 오월의봄, 2023.
동료 편집자가 편집한 이 책은 개인적으로 2023년 가장 치열하게 읽은 책 중 한 권으로 기억됩니다. 퀴어 페미니즘과 장애학, 교차성 분야의 고전이자 교과서로 거론되는 이 책이야말로 질문의 저력을 보여주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심지어 독자를 그 질문들에 계속해서 연루시키고 연루되길 독촉하는 이런 교과서가 세상에 있었던가요? 장애와 질병, 혹은 취약함을 둘러싼 어렵고 복잡한 정치적 질문들이 발생하는 곳이 바로 지금, 그러니까 우리가 온갖 물건들을 소비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화장실에 가고 여가를 즐기고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는 이 순간이라고, 이 찰나의 순간에마저 누군가는 끊임없이 지워지고 있다고 저자는 쉴 새 없이 말을 겁니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 말이죠.
따라서 무미건조하고 게으른 읽기란 한순간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그 질문을 결국 가장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자의 태도에 우리는 물들고 스며듭니다. 퀴어 페미니즘과 장애 문제를 논하는 핵심 키워드로 ‘미래’를 꼽은 저자의 그 선택부터가 이미 하나의 태도이며, 이 책을 읽어야 할 강력한 이유가 됩니다. 저자는 홀로 문장을 써내려가는 대신 계속해서 제안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그려보길 주저하는 ‘불구의 미래’를 마음껏 상상해보자고. 그 미래를 위한 단초들 역시 억압 가득한 이 세계 안에 있으니 같이 발굴해보자고.
이 상상은 미약하지도, 헛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려는 순간, 장애를 둘러싼 기존의 억압적인 관계망은 이미 논쟁에 부쳐지고 심문의 대상이 됩니다. 그 자명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장애와 그 미래를 다르게 상상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런 상상이 여기저기에 자주 출몰할수록 억압의 위세는 불안정해지지 않을까요. 이 책이 뚫어놓은 미세한, 그러나 무수히 많은 구멍들이야말로 비장애중심적 세계의 안온함을 산산조각 낼 거라고 확신하며, 또한 ‘치유의 미래’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더 독창적이고 더 복잡한 미래가 우리 곁에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집어들면 좋겠습니다!
4. 앨리스 웡 엮음,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박우진 옮김, 가망서사, 2023.
저는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참 좋아합니다. 원제인 ‘Disability Visibility’(장애 가시화)가 그대로 쓰였더라도 이만큼 이 책을 좋아하게 될 수 있었을까 싶은데요. 앨리슨 케이퍼는 “페미니즘적/퀴어적/불구적 미래를 위한 불구 연합”과 그 “연합의 순간”이 단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활기차게 존재”한다는 말로, 동시에 “접근 가능한 미래”라는 표현으로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를 끝맺고 있는데, 이 끝을 시작으로 이어주는 책이 바로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예요. 실제로 ‘페퀴불’ 직후에 이 책을 읽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다양한 장애 유형/경험, 인종, 젠더 정체성을 지닌 여러 당사자들의 에세이를 엮은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는 현재 진행형인 그 삶과 연합의 스펙트럼을 우리 앞에 펼쳐놓습니다. 사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는 뜯어보면 볼수록 낯설고 이상한 말이에요. ‘급진적’이라는 동적인 느낌의 형용사와 ‘존재하다’와 같이 항구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는 서로 조합되기에 어색하죠.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기존의 문법에서처럼 ‘불변의 어떤 상태’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존재하다’라는 말을 둘러싼 의미망 자체를 문제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 책이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그것 아닐까요. 누군가에게 ‘존재한다’는 건 불변의 당연한 상태/사실이 아니라 매 순간 분투가 필요한 가장 동적인 활동일 테니까요. 그 투쟁은 거리, 학교, 직장, 병원, 대중교통, 옷가게 따위의 일상적인 장소는 물론 심지어 교도소와 같은 예외적 장소에서도 시시각각 벌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시적 투쟁들을 자기 삶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당사자들의 놀라운 기지, 그게 바로 이 책이 말하는 ‘급진성’일 겁니다.
개성 넘치는 37편의 에세이 전부를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제게 가장 강렬한 인장을 남긴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의 문장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나를 바라본 것만으로도,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35~36쪽) 고정관념이 현실에서, 그러니까 ‘나와 타인의 관계’ 사이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짚어내는 문장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5.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2007).
독서노트의 마지막 목록은 쉼보르스카의 시집입니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에 등장하는 맥브라이드 존슨의 저 문장을 읽는 순간, 단번에 이 시집이 떠올랐어요. 시집에 실린 시인의 발언(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한 대목이 그의 문장과 겹쳐져서였죠.
“지금껏 쭉 이야기를 듣고 계신 청중 여러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살인자들, 독재자들, 광신자들, 몇 가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 역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또 열광적인 아이디어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냐구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네,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합니다.”(451쪽)
쉼보르스카는 아우슈비츠가 위치한 폴란드 태생으로, 그가 등단한 1940년대 후반 무렵의 폴란드는 통일노동자당에 의한 스탈린식 철권통치가 시작된 시기였다고 해요. 실제로 그는 당시 폴란드 문단이 강요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충실히 이행한 시집 두 권을 내놓기도 했죠. 이 뼈아픈 경험이 쉼보르스카의 여러 시들에 녹아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는 전쟁과 참사의 현장을 다루는 시들, 체제의 폭력을 드러내는 시들, 더 나아가 인간의 문명과 그 언어의 공허함을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시선으로 꿰뚫는 시들을 주로 선보였습니다.
시인이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라는 거대한 권위가 작동하는 장에서 앎, 즉 알고 있다는 믿음의 위험함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은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451쪽)을 높이 평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에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줍니다.”(452쪽)
어쩌면 이 세계의, 우리 사이의 견고한 벽을 허무는 이들은 그런 이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이들. 쉼보르스카의 말처럼, 그 말을 날개 삼아 날갯짓해보려는 이들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