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라디오에서 이제는 정말 봄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채널을 돌려봐도 온통 봄 이야기였네요.
추위의 곤란으로 모두를 봄 애호가로 만드는 2월의 마지막 레터, 오늘은 새로운 코너들로 인사를 드리려고 해요. 책을 면밀하게 독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길잡이가 되어 줄 <편독자의 노트>, 오월의봄에만 존재하는 개념들 혹은 오월의봄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되는 단어를 정리한 <오봄사전>입니다.
그럼, 새로운 코너도 기쁘게 읽어주시고요! 다음 레터 발송일인 3월 5일에는 3/8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의 날 특집호가 발행될 예정입니다. 혹 듣고 싶은 이야기나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피드백 채널에 남겨주세요! 그럼, 오늘의 <오!레터> 시작합니다.
오늘의 <오!레터>
📝 편독자의 노트
* 『변신하는 여자들』을 읽는 몇 가지 방법
🤸♀️ 마케터의 책장 정리
* 키워드: 전쟁 그리고 억압
🔖 오봄사전 (N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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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5 [1]
안녕하세요. 새 코너로 첫인사를 드리는 편집자 임세현입니다.
앞으로 ‘편독자의 노트’ 코너로 종종 찾아뵈려 해요.
‘편독자’가 뭐냐고요? ‘편집자+독자’를 제 맘대로 조합한 호칭입니다. 😅
사실 전 편집자라는 직업보다 독자로서의 제 정체성을 더 애정해요. 물론 그 둘이 분리되기보단 단단히 엉겨 있었으면 합니다. 편집자는 편집자이기 전에 첫 번째 독자이니까요. 원고를 읽는 내내 제 곁에 머물렀던 잡다한 생각과 질문, 때론 잘 수습되지 않던 고민까지, 꾹꾹 눌러 담아 글을 띄울게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 n번째 독자분들을 기다리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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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신하는 여자들』을 읽는 몇 가지 방법 ✲
: ‘변신’과 ‘변심’ 사이에서 길 잃고 헤매다보니 어느새 책이 나와 있었다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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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는 여자들’이 아니라 ‘변심하는 여자들’이네요!”
『변신하는 여자들』 작업이 한창일 때, 책 디자인을 맡아주신 디자이너 팀장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귓가에 울립니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을 설명한 저에게 유머를 보태 대답하신 거예요. 스쳐 지나가듯 나눈 대화였지만, 뼈를 때리는 진실이었죠. 그 이후로 저자 장영은 선생님과도 비슷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눴어요. (이 글의 부제가 진짜x100 찐제목이라고 백만 번 외칩니다ㅠㅠ)
실제로 책이 다루는 근대 여성 지식인 8명의 ‘이력’만을 놓고 본다면 분명 ‘변심하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8명 중 무려 5명이 ‘친일 인사’로 분류되거나 이승만·박정희 등 독재정권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지속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승려의 길을 택한 문인 김일엽과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이화림·허정숙을 제외하면 한국사에서 상당히 ‘문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이들이죠.
여기까지 이르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토록 문제적이고 시원찮은 인물들의 생애를 왜 읽어야 할까? 그렇잖아요. 세상에는 훌륭하고 멋진 여성들이 참 많은데, 남성 독재자의 최측근에 머무르며 자신이 벼렸던 사상을 스스로 저버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굳이 왜 들여다봐야 하는 건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면밀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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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순물들
권력을 쥐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여성 지식인들의 자서전/자기서사를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심란했습니다. 아 이건 뭔가 참으로 불순물들이 가득 끼어 있는 글이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했어요. 화자는 자신이 공들여 지어올린 자기서사의 세계가 나름대로 견고하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엔 생각보다 많은 균열들이 존재합니다. 『변신하는 여자들』은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그 틈들을 파고 들어가는 책이에요.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이 미묘한 지점을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정의란 곧 “올바르게 읽기”라고 믿었던 베유는 올바르게 읽기의 실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어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읽어내는 것이 실제의 그와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혹은 그는 분명 우리가 그에게서 읽는 것과 전혀 다른 무엇임을 읽어내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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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마음을 어지럽힌 다섯 명의 여성들을 소개합니다ㅠ 왼쪽사진(모바일 버전은 윗사진)부터 모윤숙, 김활란, 박인덕(위), 임영신(아래 2컷), 최정희. 대학(이화여대, 중앙대) 총장, 교육기관 설립자, 세계적 연설가, 국회의원, 문인/작가 등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한 이들이죠. 특히 김활란과 임영신은 이승만 정부 시절 요직을 점하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모윤숙은 자신의 바람과 달리 공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승만의 조력자로 활약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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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화하지 않기
제가 원고를 읽으며 가장 경계했던 건 ‘고정관념’이었어요. 친일파에 대한 고정관념, 권력자에 대한 고정관념 등등. 카테고리만 들어도 바로 떠오르는 아주 전형적인 이미지 말이죠. 그런 걸 경계했던 이유는, 친일파나 권력자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어요. 앞서 이야기했듯 그 여성들이 애초부터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여성인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고, 커리어를 다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여성을 늘 추문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용감히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여성이 겪는 여러 차별과 폭력에 앞장서 문제제기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 여성들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지적인 여성들이 왜 그토록 자신이 쌓아올린 지성에 반하는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알지 못하겠더라고요. 주어진 정황이나 당사자의 말 몇 마디를 통해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죠. 하지만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다른 선택지에 대한 ‘상상력’ 아닐까요?
📍 여성의 여성혐오, 페미니스트의 반페미니즘……
제가 읽은 그녀들은 실제로 악마도 괴물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죠. 일에서 성취를 거두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 하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절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기 성찰이란 걸 부단히 갱신하지 않는 그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결말 같았거든요. 아무리 훌륭하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나쁜 쪽으로’ 변화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결코 없으니까요.
실제로 지금 우리는 그 무수한 사례들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반여성적인 담론을 펼치는 여성학자, 페미니스트 정치를 표방하던 여성 정치인의 납득할 수 없는 행보, 온갖 래디컬 이론들을 섭렵했던 학자들의 놀라운 퇴행 등 삶의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사유하고 성찰하기를 멈춘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변신하는 여자들』은 그런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해한 영향을 끼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어요. 중앙대학교 설립자/총장에 국회의원을 역임한 것도 모자라, 한국 여성 최초로 장관직에 오른 임영신을 ‘성공 가도’에 안착시킨 가장 큰 동력이 그녀의 '여성혐오'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책에 등장하는 권력지향형 여성 지식인들을 포함해 퇴행의 회로를 밟는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대의’와 ‘공과’를 강조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대의가 정작 어떤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사실은 절대 보지 않죠. 김활란처럼 자기 자신을 그러한 대의와 완전히 동일시하며 공직 그 자체로 치환해버리는 경우도 있고요. 사적 삶의 영역은 완전히 말살한 채로요. 인간은 공적 존재인 동시에 사적 존재인데, 무엇이든 이 중 하나를 완전히 소거해버린다면 단연 참담한 결과가 나타나겠지요.
누군가 밟았던 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밟고 있을 이런 전철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미 존재하는 길이 아닌 다른 수많은 길들을 직접 그리고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우리에겐 이 여성들의 삶을 읽어내되, 그와 다른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이쪽 혹은 저쪽으로 손쉽게 내달리려 하지만 않는다면, 무수히 다양한 길들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전 믿어요.
📍 성공한 여성들의 실패, 실패한 여성들의 성공
여기서 잠깐 tmi 하나만 방출할게요.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일제 혹은 독재정권에 영합해 한평생 권력의 지위를 점한 여성들의 사진은 국가의 공식 DB에 차고 넘치는데,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던 이화림·허정숙의 사진은 단 한 건도 검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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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록원 DB에 검색한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장관직에 오른 임영신의 자료는 131건에 달했지만, 이화림의 이름으로는 단 한 건의 자료도 검색되지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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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는 여자들』에 수록된 상당수 인물사진은 국가기록원 DB에서 정식으로 제공받은 자료인데요. 그 DB에 사회주의자들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습니다. 반면 김활란, 모윤숙, 임영신처럼 독재권력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요직을 점했던 이들은 행사 건별로 다양한 사진들이 제시되어 있었어요. 그런 결과를 확인하고 나니 묘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진부한 질문이지만, 인생에서 성공이란 과연 무엇이며 또 실패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장영은 선생님께서도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셨고요.
편파적인 아카이빙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진실을 구석구석 탐구하는 원고를 보며 참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 원고는 성공한 여성들의 실패를 엿보고, 실패한 여성들의 성공을 발견하는 책이라고.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예요.
📍 ‘변신’ 혹은 ‘변심’
실제로 저에게 ‘변신’과 ‘변심’의 진정한 차이를 알려준 인물은 사회주의자 이화림입니다. ‘변신하는 여자들’이라는 이 책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몸의 모양/형태’를 바꾸는 행위가 변신의 사전적 의미라고 할 때, 몸의 모양을 바꾼다는 것은 곧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 아닐까요? 자기 삶의 근거지였던 곳을 수시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과 공부를 시작하며 과거와 전혀 다른 양식으로 몸을 단련해나간 이화림의 궤적이야말로 ‘변신’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책 8장에서 자세히 소개되는 이화림의 회고록은 정말이지 놀라워요. 한인애국단을 함께했던 김구도, 조선의용대를 함께했던 남성 동료들도 그녀의 역량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화림은 이런 것쯤에야 굴하지 않았습니다. 또 과연 그들에게 이화림의 삶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에요. 중국 각지를 이동하며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 없이 실행했던 비범한 여성의 이야기를 이젠 제대로 조명할 때입니다.
이화림이 보여준 ‘변신’은 ‘변심’의 의미 또한 훨씬 더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바뀐 생각이나 마음을 몸이 전혀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태를 ‘변심’이라고 한다면, 이 단어에 너무 많은 뜻을 담은 걸까요? 그렇지만 마음/생각의 변화가 몸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 즉 자기 자신은 한치도 바뀌려 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조종하고 외부의 조건만을 계산하려 할 때, 삶에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수록 삶은 더욱더 추락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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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경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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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게 어떤 면에선 철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상상해보고 싶습니다. 권력의 하수인이 되길 자처했던 여성 지식인들이 인맥과 명성, 그릇된 대의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하는 대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랬다면 지식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사상가로서 훨씬 더 나은 무엇을 꿈꾸고 욕망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행간의 진실
그녀들 역시 내면에 존재하는 그 목소리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목소리는 그 자신이 끝내 침묵하거나 변명했던, 혹은 미화하거나 감추려 했던 모종의 진실이기도 합니다. 비록 화자가 직접 말하지 않는대도, 읽는 사람은 알 수 있어요. 지나치게 말하거나, 극도로 말을 꺼리는 석연찮은 대목들에 멈춰 설 때, 그 행간들이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침묵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선명히 진실을 표현해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후회와 변명으로 날을 지새웠던 어떤 삶들 앞에서, 또한 이미 결론이 정해진 삶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입니다. 그 삶을 ‘제대로’ 읽는 것. 이로써 ‘변심하는 여자들’과의 긴 여정을 끝내고 다시 시몬 베유에게로 돌아왔네요.
독자분들께서 이 문제적 여성들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뜯고 풀어보시면 좋겠어요. 저는 근대 여성 지식인들의 삶을 읽으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되, 다시금 자기 자신이라는 ‘점’으로 축소되선 안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 어떤 태도를 닦고, 어떤 삶을 꾸려야 하는지는 매 순간 고민하고 또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변신하는 여자들』의 n번째 독자분들께서 보태주실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기다려지네요. 길고 험난한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n번째 독자분들께
편독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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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투이 장편소설, 윤진 옮김
퀘백에 정착해 살아가는 베트남 이민자 소녀 '안 띤'의 이야기입니다. 자전적 성격의 범위가 얼마만큼인지는 모르지만 킴 투이의 출생이 1968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이 남베트남에 대공세를 펼쳤던 때라는 걸 생각하면 경험이 침투한 에세이로 읽히기도 해요. 흥미로운 지점은 각 장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단어가 다음 장의 시작으로 연결되는, 마치 거대한 끝말잇기 같은 서술이었어요. 망명, 수용소, 탈출 등의 전쟁 참상 속이지만 실제적 사건의 나열보다는 화자의 정서가 축이 됩니다. 비참을 떨어져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발화가 시작될 수 있듯, 질곡의 세월을 보낸 뒤 그것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게 실개천처럼, 자장가처럼* 바치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ru[뤼]는 프랑스어로 '실개천'을 뜻하고, 베트남어로 ru[루]는 '자장가' 혹은 '자장가를 불러 재워주다'는 뜻이라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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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세계문학 작가'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서구문학 작가가 떠오르진 않나요? 아시아계 작가들이 점점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저에게도 중국 문학은 조금 낯설었어요. 이 책은 중국 여성 작가 딩링의 국내 초역 중단편입니다. 딩링은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 속에 있었기에 그의 글 역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작품해설을 보면 그가 왜 그런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그 지점에서 『변신하는 여자들』의 여성들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표제작인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전시 상황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에 대한 시선을 고발하고, 의지의 여성 주인공을 통해 그에 분투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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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이 책은 정말 숨죽여 읽었던 기억이 나요. 헤르타 뮐러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는데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게 될 정도로요. 이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그리고 있어요. 현실에 있는 언어로 담지 못할 만큼 처참한 수용소의 모습 때문이었을까요, 헤르타 뮐러는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열망을 담은 듯한 "양철키스", "심장삽" 등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만의 단어를 만들어냅니다. "숨그네"도 "숨"과 "그네"가 합쳐진 말로 인간의 숨이 그네처럼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에요. 인간 본성과 소재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는 작가의 능력이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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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인싸를 죽여라》(앤절라 네이글 지음, 김내훈 옮김)의 원제는 Kill All Normies입니다.
normie는 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은어인데요. ‘규범’을 뜻하는 norm의 의미로 추측할 수 있듯 normie에는 ‘보통 사람’ ‘일반인’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이를 비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에요. 인터넷 은어 위키사이트 ‘어반딕셔너리’에는 이런 용례가 있습니다. “그 사람 음악 취향은 그냥 평범해(She’s just got normie taste in music).” 평범한 것을 비하하는 뉘앙스가 담긴 이 말이 미국의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쓰일 때, 멸칭의 성격은 훨씬 더 강해집니다.
《인싸를 죽여라》를 옮긴 김내훈 역자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normie의 번역어로 ‘인싸’를 채택했습니다. “사회 규범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가령 직장에 다니거나 연애를 하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 등을 ‘평범하게’ 수행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주류의 감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멸시와 증오를 담고 있는” normie의 의미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싸’가 멸칭으로 쓰일 때의 용례와 매우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normie라는 말에는 주류 문화를 멸시하며 거부하는 데 기반한 하위문화적 우월의식이 담겨 있기도 한데요, 문제는 이것이 정치적 감수성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normie를, 인싸를 향한 경멸로 표출되는 이 혐오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도대체 어떻게 정치와 연결됐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인싸를 죽여라》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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