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 다니려고 차를 샀다
작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방의 흰 천장. 대부분 내 몸은 침대, 아니면 바닥, 아니면 바닥과 침대에 걸쳐 놓였었다. 매년 12월 마지막 날 해거름에는 마음을 조금 더 보태 다음 해에는 더 애써보리라 다짐했건만, 작년은 어쩐지 그것에도 속지 못했다. 말 그대로 '죽치는 한 해'였다.
원인은 다니던 직장을 관둔 것과 삶의 다각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겹쳐 찾아온 무기력증이었다. 무기력이 부끄러움인 줄 알고 지내던 여름날, 나는 갓 마흔이 된 친구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서 물었다. "언니, 언니도 이때 이랬어?", "언니, 이럴 땐 어떻게 했어?", "언니…." 나는 계속 물었고, "언니, 나 잘하고 있지?"라는 말은 못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어련히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심하게 핸들을 돌리며 덧붙였다. "야, 너는 앞으로 직업 열댓 개는 더 바꿀 수 있어! 지금이 끝일 거 같지?" (좌회전하며)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진짜 아무것도 아냐." 이 대답은 자신의 알은체로 보일까 걱정하는 말투도, 내게 선생이 되겠단 수도 아니었다. 친구로 지낸 수 년간 '아무 거'를 겪은 것 같이 보이는 그의 '아무것도 아니야.'를 들으면서 나는 조금 안도했다.
그 말이 내게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 보니 나는 출판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책을 알리는 일이 내게 주어졌고, 나는 내 책장에 심심찮게 보이던 오월의봄의 책들을 다른 이의 책장에도 꽂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자원이 다른 이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미 좋은 것을 알릴 자신은 있었다. 그래서 매우 기뻤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이동이 문제였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어느 언덕 위이고 회사는 파주 출판단지 내에 있는데, '눕기'에 단련된 몸을 끌고 매일 집-정류장-회사-정류장-집의 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드디어, 회사에 들어가기 두 달 전 기운을 내 땄던 운전면허가 쓸모를 부릴 차례였다.
그렇게 입사 5일 후, 나는 차를 샀다.(중고 and 할부….)
처음에는 오직 출퇴근만 바라보고 구매한 작은 차였다. 월세와 할부금을 요리조리 따져보고 생활비를 점쳐야 했지만 차를 끌고 회사에 다녀보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게다가 좀 쳐진다 싶을 때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면 그만한 환기가 없었다. 옆에 계시던 동료 편집자님은 "아니, 이렇게 빨리 차를 샀어요?!" 라고 놀라셨고, 나는 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작은 나의 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와 자유로를 달린다. 움직이는 고철들 뿐인 직선 도로를 달리다 파주로 들어서면 차 밖에는 아직 나무가 헐벗었지만, 멋스러운 갈대들이 아름답게 있다. 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읽는, 읽을, 읽다 울은, 나를 가르친, 그리고 내가 알릴 책들이 실려있다. 책을 찍을 카메라는 뒷좌석에 있고, 출근해서 먹을 간식은 조수석에 태운다. 차를 타고 회사에 가는 동안 나의 무기력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주도하는 이동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나는 가끔 출근하며 핸들을 왼쪽으로 꺾을 때, 친구가 해 준 말을 생각한다. 가끔은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도처에 널린 말이 나를 바로 세울 때가 있다. 세상에는 저주가 너무 많은 것 같고 지금이 끝일 것만 같을 때, 내게는 이제 그 말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차에 시동을 걸고 그 속에서 울거나 노래를 듣고 가고 싶은 곳에 갈 것이다. '출판사에 다니려고 차를 산' 이야기라고 했지만 이것은 차량 구매기도, 회사 입사기와 적응기도 아닌 이상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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