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원생이던 1998년에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이라는 주제로 첫 인터뷰를 했다. 그 당시 참여했던 현장연구 방법론 세미나의 필수 과제가 소규모 민족지학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섹슈얼리티와 대중문화의 관계에 흥미가 있었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사적 공간의 프라이버시로 격하되지 않고 공적 존재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공간과 장소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다. 운 좋게도 그 무렵 여성지향 섹스토이숍 인티머시스Intimacies가 내가 살던 작은 대학가 마을에 막 개업한 참이었다. 인티머시스에서 경험한 일들이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의 역사를 이해하고 소매 문화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나는 인티머시스 운영자 에일린 저니Aileen Journey와 나눈 초기 인터뷰로 몇 번이고 되돌아갔다. 이 인터뷰는 나에게 연구자로서 처음으로 돈오頓悟의 순간을 맞도록 해준 경험이기도 했다.
저니는 자신의 사업이 “여성이 자신의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페미니스트적 방법”이라고 여기며 섹스토이숍 굿바이브레이션스Good Vibrations를 모델 삼아 가게를 꾸렸다고 내게 말했다. 굿바이브레이션스는 겨우 50달러의 명목상 비용을 받고 저니에게 섹스토이 공급업체 명단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는 굿바이브레이션스 창업자인 조아니 블랭크Joani Blank가 전국의 많은 도시에 비슷한 가게가 생기길 원했기 때문으로, 인티머시스 이외에도 많은 섹스토이숍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저니는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사업 모델에는 “포르노가 여기저기 나돌아다니지 않는”, 편안하면서도 고객이 환대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강조를 두는 방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은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어떻든 모든 여성과 남성이 성적 대상이 아닌 주체로 설 수 있는 곳이었고, 제품을 공개적으로 진열해 사람들이 [편하게] 물건을 고르고 “이게 괜찮은 물건이라고 추천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저니는 인티머시스가 사람들이 섹스에 관한 질문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센터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남성 고객에 주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성인용품 가게와 이 사업체가 차별화되는 요인을 더 잘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판매 점원과 고객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며 인티 머시스에서 몇 시간씩 보냈다. “가게에 들어와서 이런 물건 이야기를 하면 정말 해방감이 느껴져요!” 한 여성 고객이 강조했다. 다른 고객은 “난 여기 올 때마다 더 용감해져요. 처음 왔을 때는 아는 사람이 나를 볼까 무서워 어깨 너머로 넘겨다 봤어요. 두 번째 왔을 때는 직원분이 물건 작동법을 설명하자 얼굴을 붉혔고요. 이번엔 그냥 아무 데나 주차를 해버리고 바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 공간에 매혹되었다. 나는 곧 이것이 한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섹스토이를 팔고 섹스를 이야기하는, 성 거래와 페미니스트 정치학이 결합된 특정 방식을 도입한 전국적인 기업 네트워크 전체의 이야기라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즉각 이 소규모 조사를 발전시켜 굿바이브레이션스 모델의 역사와 자취를 더 세심히 진술하고 밝힐 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연구 과제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성적 은어, 사업 방법, 이념, 난점, 역설이 이 사업체들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더 알고 싶었다.
나는 페미니스트 성전쟁sex war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 즉 포르노그래피, BDSM, 부치-펨 관계,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성적 표현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많은 페미니스트를 양극으로 갈라놓았던 시기에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 기획은 나와 특별히 공명하는 데가 있었다. 학부 시절에 나는 여러 가치와 정치적 헌신이 경합하여 페미니스트 그룹이 분열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섹슈얼리티 의제를 놓고 입장이 반대라는 이유로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여성학 교수님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그 공적 표현을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전쟁은 빈번하게 여성의 성적 쾌락 추구와 남성 욕망 및 폭력이라는 익히 알려진 위험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도 하다. 나의 페미니즘 이해와 나 자신의 섹슈얼리티 역시 이 전쟁과 깊이 얽혀 있다.
같은 시기에 나는 도슨이 여성 자위에 대해 쓴 기념비적 논문을 접했다. 이 논문은 자위가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디딤돌이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90년대 초반, 나는 생애 첫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굿바이브레이션스를 방문했다. 《온 아워 백스On Our Backs》에 실린 수지 브라이트Susie Bright의 칼럼 〈우리를 위한 토이Toys for Us〉에서 알게 된 그 가게였다. 내가 섹스토이숍에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록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그날의 방문은 마치 통과의례 같았다. 완전히 새로운 성적 상상과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자격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건대 나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 다양한 ‘성적 공중sex public’(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숍, 섹스 가이드, 에로티카 소설, 그리고 페미니스트 포르노그래피)과 접하지 않았다면 나의 성적 여정이 어떤 길로 접어들었을지 그려보기 힘들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뉴욕에 있는 페미니스트 소매점 베이브랜드에서 학위논문을 위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나는 내가 성 문화 개혁 운동의 선두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판매 현장에서 성교육 담당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가게의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내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수백 명의 고객과 그들의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내게 할당된 분량의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판매하고, 직원 회의와 마케팅 회의에 참석하고, 한 번에 몇 시간씩 연이어 서서 일했으며, 마감할 때는 손깍지를 끼며 시재 정산 금액이 맞기를 기도했다. 민족지학자의 꿈이자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페미니스트 섹 스토이숍의 내부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관찰자이자 참여자, 민족지학자이자 바이브레이터 판매원인 나의 위치는 내가 베이브랜드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섹스토이 소매점들이 고객에게 자랑스럽게 제공하는 성 말하기 현상 안으 로 곧장 진입했음을 뜻했다. 나는 쇼핑객들과 지스팟G-spot, 끈 달린 딜도, 그리고 바이브레이터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고객들에게 성 관련 정보를 주고, 흔히 퍼진 근거 없는 우려에 반박했으며(“바이브레이터에 중독될 수도 있지 않나요?”에 대한 대 답은 “아니오”다), 좀 더 성적 쾌락을 즐기며 살고 싶은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한 고객들의 불안을 달래주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일종의 성 상담가라고 할까,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실전 요령도 갖춘 유사 전문가로 본다는 것을 안다. 사교 모임이나 저녁 식사 파티에서 내 연구는 자주 화제에 올랐다. 파티 주최자는 “이분들한테 네 연구 이야기 좀 들려줘”라고 말하곤 한다. “여러분은 얘가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지 절대로 못 맞히실걸요!”라는 말도 들린다. |